한국 드라마 이야기/무신(武神)

무신(武神), 죽기전에 신변정리하는 최충헌 맹수의 영웅관

Shain 2012. 4. 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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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유래된 격언 중에 '새 술은 새 부대에'란 말이 있습니다. 본래 성경에 적혀 있던 말인데 과거엔 술을 병이 아닌 가죽 부대에 담곤 했고 오래 술을 담아둔 가죽 부대는 낡아 쉽게 찢어지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란 뜻일 것입니다. 요즘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새로 일을 맡은 사람이 기량을 발휘하게 해주려면 알맞은 조직이나 기반을 마련해주란 뜻으로도 쓰입니다. 이는 과거 왕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선대 왕을 모시던 기득권 세력은 새로운 왕에 방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왕조를 뒤엎을 수도 있는 위협적인 세력이 되기도 합니다.

왕이 아니라도 정치란 것은 기존 세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위축시키느냐에 따라 정책의 효율성이 결정됩니다. 최대한 빨리 집권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좋고 기득권 세력을 완전히 숙청하지는 않더라도 무력화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드라마 '무신(武神)'의 최충헌(주현)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 최우(정보석)에게 마련해주고 싶었던 권력의 발판도 다름아닌 그것이었습니다. 최향(정성모)을 지지하는 사인방은 최충헌에 아첨하여 권력을 얻은 자들입니다. 물론 실제 최충헌이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죽어갔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최우와 마지막 술잔을 들고 최후를 마치는 최충헌. 역적의 목숨을 함께 가져간다.

최충헌의 무시무시한 뒷정리, 즉 '피는 내 손에 묻히고 죽는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이런 연출을 제일 먼저 보여준 드라마는 제 기억에 '용의 눈물(1996)'입니다. 당시 태종 이방원(유동근)은 아들 세종(안재모)의 앞길을 막을 외척을 제거하기 위해 아내 원경왕후(최명길)의 집안을 박살내놓기도 하고 세종의 장인이자 사돈인 심온을 죽여버리기도 합니다. 태종은 결국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나라를 걱정해 기우제를 지내다 죽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내가 죽은 후의 권력을 걱정하는 영웅. 어쩌면 이것은 작가 이환경의 영웅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가장 측근에서 보좌한 세 사람의 목을 보며 최충헌은 역적들의 목이라며 흡족해 합니다. 한때는 최충헌에 충성한자들이지만 이제는 최충헌의 권력을 빙자해 최우의 앞길을 막는 역적일 뿐입니다. 권력은 손에 쥐는 것도 어렵지만 스스로 손에서 놓는 법도 어려운 법이라 권력의 마지막은 확실히 허망한 것인가 봅니다. 비록 최고의 간신 김덕명(안병경)이 최향을 배신해 살아남았지만 후일을 도모하라 최우에게 일러두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최향을 보며 최우에게 살려달라 빌라는 아버지 최충헌의 마지막 부정. 아들의 새 권력을 보며 마지막 술잔을 드는 그의 최후는 맹수의 죽음 만큼이나 대단합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그럴듯한 영웅의 최후

저는 권력자가 곧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특정 정치인을 좋아하거나 지지하기는 해도 그가 완벽하다거나 무결한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권력을 움켜쥔 자에게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받들고 존경할 만큼의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환경 작가의 작품에서는 최충헌이나 최우같은 권력자는 힘의 절정에 이른 자로 탁월한 영웅성을 지닌 인물로 연출되곤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위해 권력을 쥐었다는 최우의 설득에 최춘명(임종윤)과 이장용(이석준)이 새 정권에 충성하는 것으로 묘사되어도 과연 최우의 정권이 정의로웠는지는 회의적입니다.

최충헌이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환약을 먹다 마지막 하루에는 호랑이처럼 기운이 솟아오르는 검은 환약을 먹는다는 설정은 그의 최후를 비장하게 만듭니다. 고려 최고 권력자로 왕 조차 자기 멋대로 갈아치운 최충헌일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과오를 도려내기엔 너무 늙고 무력했다는 것입니다. 최충헌은 검은 환약을 먹는 날 자신의 측근들도 모두 함께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결단력있는 영웅으로 변신합니다. '고려사'에 남은 기록과 드라마틱한 연출이 합쳐져 자신의 신변까지 정리하고 죽는, 깔끔한 영웅이 탄생한 것입니다.

최우의 설득으로 살아남은 최춘명과 이장용.

유사 이래 많은 영웅이 있었지만 자신의 죽음 이후까지 깔끔하게 처리한 사람은 드뭅니다. 대부분 그 후계자가 선대 권력자의 찌꺼기를 치우기 위해 숙청을 단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외척이란 이유로 핏줄이란 이유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해 집권 내내 부패한 기득권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위세등등했던 진시황도 갑작스레 죽자 환관 조고가 큰 아들 부소에게 자결하란 가짜 칙명을 내려 정통 후계자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자신은 노애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어머니 장양태후와 그 동생들을 죽이고 친아버지 여불위까지 자결하게 하였지만 죽고 난 후의 미래 만은 어쩌지 못한 것입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 맞서 많은 영웅들이 호기롭게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권력과 역사를 영웅의 뜻대로 맞춰나갈 수 있는 걸까요. 최충헌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최충헌의 첩 동화와 놀아났다가 대장군 자리까지 오른 최준문(윤철형), 상장군 지윤심(구보석), 유송절(최재호) 장군 등은 잘못된 음양술로 최충헌에게 아첨한 김덕명(안병경)과 함께 최충헌이 가장 총애한 측근이자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최우가 최향 보다 낫다는 것을 알지만 최우가 권력을 잡으면 자신들이 죽게 될 것이기에 최향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김덕명의 죽음을 지시한 건 최우일까 박송비일까.

고려사의 기록 만으론 최충헌이 정말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최충헌이 아무리 큰 아들을 늦게 낳았다 쳐도 최소 마흔살 이상인 큰 아들이 무력한 인물이었을리는 없습니다. 죽기전 꽤 오래 병을 앓았고 큰 아들에게 '나를 찾아오지 말라'했다는 걸로 봐서는 최향과 측근 사인방의 동태를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필 딱 죽을 때가 되서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신기하기만 합니다. 최향 무리들이 최우에게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가짜 전언을 보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곁에서 최충헌을 모셨다는 김약선(극중 이주현)이 장인 최우에게 유리하도록 계략을 꾸민 것일까요.

작가는 그 부분을 최충헌이 죽을 것을 알고 다음 권력을 위해 스스로 연극을 꾸몄다고 묘사했습니다.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의 수급을 보며 흡족해하는 그 모습은 죽음을 준비한다는 맹수의 모습, 마치 백두산 호랑이처럼 늠름하고 당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들과 함께 술 한잔을 나누며 쓰러진 그는 드라마를 통해 무신정권의 영웅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최충헌이나 최우에 대한 이런 묘사는 드라마 '무신'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이면서도 가장 멋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신정권의 그들이 과연 영웅인가 하는 점엔 이견이 많겠지만 그 영웅의 카리스마는 '힘'의 매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니다.

호랑이같은 영웅도 이 셋의 운명 만은 예상하지 못했다.

드라마는 세 장군의 수급 때문에 최향이 공포에 질리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사실 최준문을 비롯한 그 장군들은 귀양에 보내졌고 최준문만 가는 도중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김덕명의 최후는 고려사에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어도 박송비(김영필)와 최우의 알듯 모를듯한 반응처럼 송길유(정호빈)같은 격한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도 높은 듯합니다. 그 뒤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아 분명 예전과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뭐, 확실한 건 최충헌의 웅장한 죽음을 위해 그들이 동반자 역할을 한 것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죠. 마치 순장을 원하던 고대의 왕처럼 죽어서도 부하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최충헌은 점잖고 생각이 깊은 김약선이 송이(김규리)에게 가장 알맞은 짝이라며 송이의 담대한 성격을 알아보았지만 송이와 김약선의 결합은 최우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다주고 맙니다. 드라마는 그 이유를 송이가 김준(김주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묘사할 예정인 듯합니다. 김준은 김준대로 월아(홍아름)의 불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니 최씨 무신정권을 향한 원한이 쌓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역시나 죽음 후의 일을 아무리 꼼꼼히 준비한다 해도 예측못한 곳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권력자가 곧 영웅일 수는 없고 더더욱 신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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