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포스팅했던대로 80년대 한국 드라마 중에는 일본 원작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표절한 내용이 꽤 많았습니다(포스팅 '직장의 신' 리메이크가 아니라 베낀 드라마라고?). 국교는 정상화됐지만 각종 문화에 대한 개방은 허락되지 않아 벌어진 현상이기도 하고 우리 나라 드라마 제작자들이 그때는 표절 문제를 그렇게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라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만화 '캔디 캔디'의 실사판도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70, 80년대 일본 만화의 대부분은 한국에 해적판으로 출판되어 꽤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중 스즈에 미우치의 '유리가면(1976)'은 '왕가의 문장(1976)', '데이모스의 신부(1975)와 더불어 30년 넘게(중간에 잠시 중단되긴 했으나) 장기연재되는 만화로 유명합니다. 전체 44권이 넘는 만화는 1997년 아다치 유미 주연의 아사히TV 드라마로 시즌1, 2가 제작되었고 애니메이션으로는 각각 1984, 1999, 2005년에 제작된 적이 있습니다. 워낙 팬층이 두터운 드라마라 그랬는지 작가가 자주 종적을 감춰 그랬는지 드라마 제작이 꽤 늦습니다.

아사히TV에서 제작된 드라마 '유리가면' 공식적인 만화원작 드라마는 이것 뿐(마야, 아유미, 츠키가케).


'유리가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난한 우동집 종업원의 딸로 태어난 마야는 연극을 좋아하고 '천의 얼굴'이라는 천부적인 연기의 재능을 갖고 있지만 연기를 배우고 익힐 환경이 되지 않고 영화감독과 대 여배우의 딸로 태어난 아유미는 어릴 때부터 천재소녀로 인정받으며 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익혀온 노력파입니다. 불운한 과거를 가진 여배우 츠키가케에게 발탁된 두 소녀는 전설의 '홍천녀'의 주연이 되기 위해 각각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겪는 주인공들의 고통과 사랑, 열정이 만화의 주된 내용이죠.


'유리가면'의 컨텐츠 자체가 워낙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만화에서 뽑아낸 에피소드를 주제로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유리가면'의 주인공인 극중 마야(한국에선 오유경이라고 자주 번안됩니다)가 출연하는 연극을 무대로 옮긴 것인데 '기적의 사람', '잊혀진 황야', '한 여름밤의 꿈', '두 사람의 왕녀', '또 하나의 영혼' 등 '유리가면'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무대가 진짜 연극이 되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1976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해서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스즈에 미우치의 '유리가면(ガラスの仮面)'


'유리가면'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실사판 드라마가 우리 나라의 '스타탄생(1989)'입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199)'의 작가 주찬옥이 원작의 내용을 아동용 드라마에 맞게 각색하여 조중현 PD가 연출했습니다. '연극 주인공을 겨루는 두 아이의 이야기'라는 모티브와 자라온 환경이 전혀 다른 두 여자 아이의 변화라는 면에서는 똑같지만 나머지 부분은 아동용이라서 다르게 엮였습니다. 비록 허가는 받지 못했겠으나 아사히TV 보다 먼저 만들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겠죠.

특히 하나 밖에 없던 엄마가 죽고 가출한 후 남자친구를 사귀고 운명적인 사랑을 하던 마야를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사는 짜장면집딸 은성(이잎새)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유미는 돈많은 목장집 외동딸인데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거짓으로 아픈 척하고 떼를 쓰는 마마걸 보경(아마 송나영이 아닌가 싶습니다)이란 아이로 설정했습니다. 한반의 학생인 두 아이는 새로운 선생님(강남길)이 크리스마스에 연극 공연을 하고 공정하게 주인공을 뽑겠다고 하자 주연이 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원작의 마야에 해당하는 은성(이잎새), 사쿠라코지 유우에 해당하는 제준(여민구).


원작에 비해 아유미의 비중이 적고 부정적인 편으로 돈많은 아유미의 엄마는 학교에 압력을 넣기도 하고 가난한 은성의 부모님은 연극같은 거 하지 말라며 은성에게 일을 시키지만 마지막엔 하고 싶다는 은성의 고집을 말리지 못하고 격려하게 됩니다. 그들이 공연하기로 한 연극은 '크리스마스 캐롤'이었고 주인공은 스쿠루지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리가면'의 유명한 장면인 '네' 한마디만으로 배운 것을 모두 이용해 여러가지 감정을 표현하기라던가 판토마임하기, 인형 연기를 해보기같은 것이 등장합니다.

당시 원작 만화도 종결되지 않은 상태였고 드라마 자체는 아동극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 갈등하던 아이들의 화합과 발전을 주제로 묘사했기 때문에 원작의 복잡한 느낌을 그대로 느껴보기는 무리입니다. 또 원작의 남자주인공인 하야미 마스미란 인물은 없고 마야의 첫사랑 사쿠라코지 유우에 해당하는 남자아이 제준(여민구)이 등장합니다. 전체적으로 마야의 연극학교 시절을 중심으로 엮은 아동버전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츠키가케에 해당하는 교사 강남길. 아유미(보경)는 이 드라마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다.


이 드라마 주인공인 은성역의 이잎새는 '조선왕조오백년'에서 어린 효의왕후를 맡는 등 어릴 때부터 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주인공 은성(마야) 역에는 제격이던 배우입니다. 이병훈 PD와의 인연으로 이병훈 PD의 여러 작품에서 감초역할을 맡곤 했죠. 지금은 이름을 '이도은'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제가는 특이하게도 지금은 배우로 더 활약중인 김창완씨가 맡았는데 당시 김창완씨가 드라마 OST를 자주 만들곤 했습니다. 노래 가사가 특이했는데 음반으로 발매된 적은 없다고 하네요.

'진달래가 피어있겠지 저 건너 푸른 동산 봄이 오면 저 산에 올라 콧노래할꺼야.. (안돼! 저 산에는 뱀도 있대) 뱀 따윈 무섭지 않아, 나뭇가지를 꺾어가지고 빙빙 돌리면 꼼짝 못하지 별들이 쏟아지는밤 나는 꿈을 꾸네. 구름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본적이있니..' 이런 가사의 노래였는데 같은 각본으로 지금 아동용 드라마로 만든다면 이 노래를 부활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베낀' 작품이긴 하지만 원작자 표시도 했고 나름 아동용으로는 의미있던 드라마란 기억이 나네요.

'조선왕조오백년'부터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한 이잎새 '마야' 역엔 제격이었는지도.


'유리가면'은 이미 40년 가까이 연재된 작품이라 처음 시작할 땐 흑백TV와 카셋트 테이프를 쓰던 시대였지만 지금 연재되는 내용을 보면 주인공들이 휴대폰을 쓰고 있습니다. 작가가 사이비 교주다 어쩌다 하는 말도 있었고 요즘도 돈 떨어지면 연재를 한다 아니면 계시를 받아 연재를 한다는 등 말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팬들이 좋아하는 건 만화 속에서 뿜어 나오는 정체모를 매력 때문이겠지요. 그 에너지를 드라마로 옮긴다는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늘 원작과 비교를 당했겠죠.

찾아보면 '유리가면'을 모티브로(원작이 아니라, 이 드라마는 원작으로 표기함) 만들어진 작품이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워낙 과거의 일이고 기준이 달랐던 시대라 '표절' 운운하기도 민망하지만 이런 드라마를 보는 재미는 역시 얼마나 원작을 잘 살려는지 또 얼마나 한국 상황에 잘 적용시켰는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유리가면'의 실사판, 생각 보다는 괜찮은 각색입니다만 로열티 지불 여부가 가장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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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성
    2017.12.08 14:25 신고

    저 이 드라마 열혈시청자였습니다. 생각나서 검색해도 관련자료 찾기 어려운데 이렇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나왔었죠. 박순천씨도 예쁜 선생님으로 나왔고, 이수나씨도 보경 엄마역으로 나왔던거 같아요. 보경이는 송나영씨가 아니었고, 좀더 까무잡잡하고 눈이 안큰 배우가 맡았었어요. 반장역으로 나온 남자아이가 참 잘생겼었죠. 이은성역할 맡은 배우가 이잎새라는건 첨 알았네요.
    김창완씨가 만든 주제가 아직도 부를 수 있답니다 ㅎㅎ 뱀따윈 무섭지않아 나뭇가지로 빙빙돌리면...하던.
    이 드라마 다시 보고싶네요. 덕분에 추억소환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