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TV 사극 이야기(1), 고증은 사극을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

Shain 2013. 8. 30. 17:14
728x90
반응형
얼마전 네이버 메인에 TV 사극 복식에 대한 포스팅이 올라와 있길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TV 드라마 중에서도 사극을 상당히 좋아해 유독 관심이 가더군요. 요즘은 정통사극이라 부를 만한 드라마도 없고 민중사극도 전무해 볼게 없다 싶습니다만 여전히 사극 고증은 재미있는 주제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사극의 고증 문제를 지적하면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라'는, 어딘가 모르게 감정적인(이 드라마 '까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뜻인게죠) 댓글이 달리는게 유행이 되버렸으나 역사와 오락물을 결합시킨 사극에서 역사와 고증이 빠지면 사극을 보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를 잃게 되는 셈입니다.

드라마 최초로 대례복과 대수머리를 고증한 것으로 추정되는 MBC 조선왕조오백년 '뿌리깊은 나무(1983)'. 이병훈PD 연출.


한 시대의 역사는 알아도 그 시대의 복식이나 문화는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잘 알려진 사서의 기록은 알아도 전해 내려오는 야사나 다른 나라의 사서는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시대 고증은 사극을 재미있게 보는 또다른 방법이자 목적이고 라마 중에서도 사극을 좋아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특징입니다. 흔히 사극을 역사와 드라마가 결합한 최고의 오락물이라고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문제가 사극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한편 사극 고증 특히 복식 고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가 뭐래도 자본입니다. 80년대까지는 조선 시대를 비롯한 사서가 완역되지 않아 이전 시대에 대한 복식 고증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궁중 생활을 하던 상궁이나 왕족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왕실이나 백성들의 삶을 고증하기는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제작비용 문제로 '사극'을 찍으면서도 고증은 신경쓰지 못했던 시기가 길었죠. 80년대 중후반부터 신봉승 작가를 비롯한 극작가와 이병훈 PD의 노력으로 '고증'도 사극의 중요한 부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통사극을 시도하거나 고증에 맞는 복식을 제작 시도하는 방송국은 KBS가 유일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KBS 정통사극이 역사를 핑계로 한 치정극이 되버리면서 빛이 바래고 있긴 하지만 '근초고왕(2010)'같은 경우 그동안 쉽게 보기 힘들었던 백제 복식이 드라마 보다 더 눈길이 가더군요. 요즘은 '대왕의 꿈'에서 웨딩드레스 스타일 한복을 입고 나오는 등 자주 구설에 오르긴 합니다만 자본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KBS답게 정통사극은 한번 찍었다 하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하곤 하죠.

시대 불명의 복식에 '어마마마'라는 부적절한 호칭까지 쓰는 '불의 여신 정이'의 인빈. 이대로 흉배까지 달 기세다.


최근에 제작되는 사극들은 '트렌디 사극'이라고 해야할지 고증에 충실한 작품이 없습니다. 그들이 드라마를 위해 재설정한 역사적 사실들은 정사를 기반으로 살을 붙이기 보다 작가의 임의로 창작된 내용이 반 이상이고 시대 상황이나 문화, 실존인물들의 관계가 어긋나기도 합니다. 최근의 사극은 역사를 담은 드라마라기 보다 한복입고 출연하는 드라마의 한 종류일 뿐이고 한복은 그들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패션일 뿐 시대를 담거나 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말죠. 지난번에 논란이 된 한 드라마처럼 조선 숙종 시대에 '하이힐'이 없으란 법이 있냐 뭐 이런식입니다.

특히 '불의 여신 정이'같은 드라마는 후궁인 인빈 김씨(한고은)가 봉황잠에 중전 만큼 화려한 금빛 치장을 하고 광해군(이상윤)과 임해군(이광수)가 인빈 김씨를 어마마마라고 부르는 등 전개 방식 자체가 사극이기 보단 현대극의 포맷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연기자들 대부분이 정통사극을 소화해낼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임에도 드라마는 사극도 아니고 현대극도 아닌 애매함으로 보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죠. 과거에 충실했으면 두 사람의 로맨스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단박에 이해가 갈텐데 대부분의 것은 현대적이면서 '왕자'와 '공초꾼'이라는 설정을 유지하니 답답할 수 밖에요.

물론 과거에는 방송국에서 대부분의 사극을 제작했기에 복식 제작을 위한 돈을 방송국에서 투자했고 PD들은 그 지원을 믿고 의지대로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만 요즘은 협찬 업체가 제시하는 디자인이 사극에서 고증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때로는 고증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제작자가 협력하기도 하고 가끔은 제작에 편리한대로 설정하다 보니 '고증'같은 건 애초에 안중에 없는 경우도 있어 보입니다. 일부 트렌디 사극이 그런식인 건 이해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작'들까지 그런 식인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이병훈PD가 고증 논란에 휘말린것도 2000년 전후니까요.


생방송 수준으로 촬영되는 우리 나라에서 '사극'은 어쩌면 선택해서는 안되는 장르인지도 모릅니다. '허준(1999)'를 비롯한 사극이 50퍼센트를 넘나드는 시청률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보장하는 사극에 눈독을 들이고 제작했으나 대개는 '퓨전'이라는 핑계로 고증을 등한시하곤 했습니다. 개연성없는 멜로와 창작된 이야기를 강조하느냐 역사는 실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는 이걸 대체 사극이라고 불러야하는지 신경쓰이는 정체불명의 드라마도 등장하고 있으니 각 방송국에 차라리 '사극'을 만들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네요.

현대극이든 사극이든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충분하면 그나마 위로가 되지만 굳이 '사극'으로 만들어야할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어 보이는 드라마가 사극 고유의 재미를 살리지 못하는 걸 보면 우리 나라가 '역사'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도 고증과 역사를 함께 생각해본다는 사극 고유의 재미를 잃어버린 셈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틈틈이 시간나는대로 어릴 때부터 사극을 좋아했던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간단하게 글을 써볼까 합니다.

과거 MBC 사극의 고증을 이끈 이병훈 PD. 사극의 대중화, 현대화를 이끈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극 고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민중사극의 거장인 이병훈 PD가 자주 거론됩니다. '마의(2012)'를 비롯한 여러 사극에서 항아리형 한복이 아닌 드레스식 한복과 가체없는 왕실 캐릭터로 비난을 받았더랬죠.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병훈 PD는 우리 나라 사극에 가체를 비롯한 예장을 제일 먼저 고증해낸 인물입니다. 80년대에는 고증의 대한 관심이 발달하지 않아 '조선왕조오백년(1983)'에서 가체를 올렸다고 비난의 대상이 된 적도 있습니다. 이례적으로 왕실의 대례복과 대수머리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재현했지만 그때는 인정받지 못했죠.

방송국에서는 고증의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던 이병훈 PD가 소속을 옮긴 후 고증을 깨트리는 당사자로 지목되는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만큼 자본과 협찬 문제가 중요하단 뜻이고 외주 제작이 대세가 된 이상 시청자들이 잘 고증된 사극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따지고 들자면 조선시대에는 가당치 않았던 나염된 옷감이나 '마마'같은 어휘 등 사극에서 잘못 설정된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겠습니다만 사극과 역사의 관계를 한번쯤 생각해본다는 것 그리고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는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병훈PD가 한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대로 고증과 역사적 해석에 충실한 사극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고 있다고 합니다. 드라마틱하지않으면 시청자가 선택하지 않고 역사에 충실하다 보니 극적인 부분이 없다고 재미없다고 하니 더 이상 사극에서 고증을 우기기는 힘들더란 말이죠.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제작할 수 없는 게 사극입니다. 사극과 드라마의 경계가 무너지다 못해 드라마에서 역사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시기도 오겠죠.

그러나 사극으로 재미 보던 방송국이 돈퍼부은 사극으로 실패하는 건 사극으로 돈 벌려면 사극 고유의 매력을 살리고 사극의 본질로 되돌아가야할 필요성도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드라마가 막장인게 문제인게 아니라 모두 막장을 만드는게 문제인 것처럼 퓨전사극이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퓨전을 만드는게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습관이 되서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인데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체(加髢)'는 '가채'가 아닙니다. 종종 '가체'라고 쓰면 '가채'라고 정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