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이 초상화 '기황후' 아닌데? 차라리 '사극'을 포기하라

Shain 2013. 12. 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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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어느 분야든 결산을 하기 마련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뉴스 보도를 비롯한 미디어의 추락이 실망스러운 한해였고 이는 드라마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저래 안 좋은 쪽으로 화제를 끈 드라마는 많지만 실속은 없달까요. 소위 유명작가들의 드라마는 대놓고 실망스러웠고 시청률에 급급한 공중파 방송국의 저급한 선택은 케이블 보다 드라마 보는 안목이 없다는 악평 까지 듣게 됐습니다. 사극은 올한해 건진 것이 한편도 없고 의학드라마는 '판타지' 의학 드라마인 '굿닥터'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작품이 없는데 '굿닥터'도 만족스런 수준은 아닙니다.

 

이 그림은 기황후의 초상화가 아니다. 원나라 순종의 황후인 '答己'로 원나라 황후 그림 시리즈 중 하나이다.

최근 월화드라마 중 가장 인기있다는 '기황후'는 여러 부분에서 화제더군요. 얼마전 인터넷에서는 실제 기황후의 초상화라는 그림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기황후'의 여주인공인 하지원을 상상했던 까닭인지 퉁퉁하고 동글동글한 초상화 속 모습이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남자같다는 말부터 저 얼굴로 어떻게 원나라 순제를 사로잡았냐는 말을 하며 웃더군요. 저 역시 어이가 없어서 웃었는데 인터넷에 널리 뿌려지고 있는 그 그림은 기황후의 초상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기황후 초상화'를 검색하면 두가지 그림이 검색됩니다. 하나는 얼마전 화제가 된 그 그림, 즉 대만 고궁 박물관(National Palace Museum in Taipei)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그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행주 기씨에서 만든 영정입니다. 행주기씨 쪽의 영정이야 후손들이 만든 그림이니 당연히 상상화고 나머지 하나인 대만고궁박물관의 그림은 원나라 순제(혜종)의 황후인 기황후가 아니라 원나라 순종의 황후로 이름은 答己(Taji)입니다.이는 중국어 위키 사이트만 가도 금방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중국어를 몰라도 'wife of Darmabala'라고 똑똑히 적혀 있는 인물을 기황후라 착각한게 신기하지만 이 부분이야  원나라 '순종'과 '순제'를 헷갈렸기 때문일 수 있겠죠. 각종 언론과 포털에서 전혀 확인하지 않고 잘못 퍼트린 정보를 복사했기 때문에 엉뚱한 황후가 기황후로 알려진 것입니다. 네이버 캐스트와 경향신문을 비롯한 여러 '믿을 만한 기관'에서 널리 알린 내용이니 잘못을 정정해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남자같은 기황후'란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황후 초상화'를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왼쪽), 네이버 캐스트에 실린 기황후 초상화.

 

방송이나 공신력있는 기관의 컨텐츠는 이런 점에서 굉장히 무섭습니다. 드라마 '기황후'의 역사 왜곡도 시청자들에게 '기황후'가 영웅이란 인상을 각인 시킨다는 점에서 우려할 부분이 많습니다. '기황후'의 초상화도 아닌 그림을 보며 '기황후'라고 킬킬대고 웃는 것처럼 이미 중국이나 몽골에도 원나라 사극인지 중국 사극인지 고려 사극인지 알 수 없는, 국적불명의 드라마가 방송중이라는, 재밌는 소식이 널리 전해질 것입니다(고려왕 왕유(주진모)가 가상의 인물이니 고려 사극이긴 힘들겠죠).

잘못 알려진 초상화 때문에 사람들이 '기황후의 진짜 모습'이라고 하면 동그랗고 통통한 몽골 여인의 초상을 떠올리게 될 것처럼 고려 출신 원나라 황후 '기황후'의 이미지가, 그녀가 권력을 쥐고 저지른 일과 상관없이 남장을 하고 용감하게 왕을 돕는 여전사 하지원으로 기억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사극'은 역사를 기반한 컨텐츠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황후'에 등장하는 역사속 인물들의 정확한 행적을 모른채 드라마를 봅니다.실제 역사가 아닌 드라마 속 캐릭터의 이미지만 기억할 뿐이죠.

 

 

 

 

 

 

 

미국 HBO 방송국처럼 아니면 영국 BBC 방송국처럼 사극을 제작할 때 주인공을 무조건 영웅화시키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기준이나 역사적 사실 관계를 거스르지 않고 픽션을 덧붙인다는 원칙을 지켰다면 기황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드라마에 넣진 않았을텐데 싶기도 합니다. 이미 '기황후'라는 드라마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사극'이 아니지만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존인물들이라 무시할 수도 없는, 기형적인 드라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시청률이 깡패인 방송국 상황을 볼 때 앞으로도 이런 드라마 제작을 절대 포기할 리 없겠죠. '기황후'의 시청률이 10퍼센트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만능 도깨비 방망이처럼 쓰이는 '퓨전사극'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정리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퓨전 사극'을 역사 왜곡의 변명처럼 쓰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의 경우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에 전체 이야기가 실존인물의 삶과 거의 같아도 가상의 등장 인물이나 창작을 섞은 경우 캐릭터의 이름을 바꿉니다.

미국 마피아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흥미롭게 보여준 '보드워크 엠파이어(Boardwalk Empire)'는 너키 존슨'이란 실존인물을 '너키 톰슨'이란 가상의 인물로 바꿔 드라마를 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대로 '기황후'가 실존인물들의 이름이 아닌 가상의 이름으로 제작되었다면 지금과는 반응이 매우 달랐을 것입니다. 꼭 사극이 아니라도 역사 속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으며 그 판타지가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했을 경우 드라마틱함을 강조하기 쉬웠겠죠.

잘못된 기황후 초상화처럼 우리도 하지원이란 기황후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사극'이라 부르지 마라.

 

'사극'은 기본적으로 역사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를 말합니다. 예외적으로 '민중 사극'에선 임꺽정이나 장금같은, 사서에 짧게 기록된 민중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 땐 창작도 인정합니다만 나머지 경우 사서 속 내용을 기반으로 살을 덧붙였을 때 사극이라 부릅니다. 필연적으로 역사에 대한 관점이 개입되고 한 인물에 대한 미화냐 왜곡이냐 하는 문제가 섞일 수 밖에 없습니다. 천수를 누리다 곱게 죽은 부모를 적국에 의해 죽었다고 왜곡하는 걸 사극이라 부르긴 힘들다는 이야기죠. 관점을 바꿀 수는 있어도 그 관점 때문에 사실까지 바꿔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013년은 유난히 역사 왜곡 논란이 많은 드라마들이 제작되었습니다. '불의 여신 정이'나 '수백향'같은 드라마는 지적하기도 한숨나는 설정으로 시청자들을 실망시켰습니다. '퓨전 사극'이란 애매한 말로 역사와 창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것이 아니라 '판타지 시대극'이라던가 '히스토리컬 픽션'같은 명칭으로 드라마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게 시청자들로서도 제작진으로서도 현명한 선택입니다. 굳이 드라마를 '사극'이란 틀 안에 가두는 동시에 특정 인물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전파한다는 무거운 비난을 지고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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