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참 좋은 시절, 뿌리깊은 식모 근성의 장소심 어느 시대 캐릭터인가

Shain 2014. 3. 24. 08:30
728x90
반응형

옛날에 식모살던 집의 사모님이 아프다며 만두국을 끓여달라 장소심(윤여정)을 부르고 그 전화 한번에 장소심은 해원(김희선)의 어머니인 이명순(노경주)을 찾아가 손수 만두국을 만들어 바칩니다. 대접받는 것도 고마운 판에 이명순은 국산 돼지고기에 유기농 야채를 썼냐며 까탈스럽게 굴고 한술 더 떠서 손빨래와 청소를 하라며 장소심을 부려먹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영춘(최화정)은 이명순을 찾아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난리치지만 장소심은 오히려 하영춘을 나무랍니다. 하영춘은 장소심의 남편인 강태섭의 첩으로 강동희(옥택연)의 친엄마이자 '시앗'이지만 장소심은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 하영춘을 자식같이 생각한다며 위해주며 배려하곤 했습니다.

 

'한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 나이어린 해원에게까지 애기씨라고 부르는 장소심의 식모 근성.

 

장소심은 진작에 이명순 집의 식모살이를 그만두었습니다. 어린아이 지능을 가진 딸 강동옥(김지호)이 어릴 때 이명순에게 얼마나 모진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이명순을 여전히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집 딸인 해원에게 여전히 '애기씨'라고 부르는 모습은 좀 많이 어이가 없더군 요. 신분이 낮은 사람이 주인댁 딸을 부를 때 '애기씨'라 했는데 보면 볼수록 장소심의 식모 근성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전화받으며 절로 허리를 굽히는 모습에 적잖이 짜증도 났습니다. 지금이 2014년이 맞긴 맞는 걸까요?

강동석(이서진)의 나이가 많아봤자 마흔입니다. 삼촌들인 쌍호(김광규), 쌍식(김상호)이 40이라 했으니 강동탁(류승수)이나 강동석이나 마흔은 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들을 늦게 낳았어도 장소심의 나이 역시 많아야 60대 후반이겠죠. 장소심이 해원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던 때는 80, 90년대입니다. 그런데 장소심의 행동방식은 아무리 봐도 50, 60년대를 살던 아주머니들 그중에서도 더욱 구시대 어머니들의 행동방식 이죠. 큰 재벌가야 최근까지도 고용인들이 '애기씨' 대신 '아가씨'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만 정서적으로 한 집안에 종속되는 식모 캐릭터는 또 간만이네요.


 

이경희 작가가 장소심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정서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장소심은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캐릭터라는거죠. 평생 밖으로 떠도는 남편의 아버지를 수발하고 그 남편이 어디서 낳아온 아들도 친아들처럼 키우고 나중에는 남편이 바람피운 여자까지도 친자식처럼 거두는 이 캐릭터는 시아버지, 시동생, 자식들을 모두 어미새처럼 품어줄 수 있는 넓은 아량의 소유자라 딸자식에게 못된 짓을 서슴치 않았던 주인댁 사모님까지도 진심으로 거둬줄 것입니다. 아마 모든 걸 품어주는 그런 어머니야 말로 추상적인 의미의 고향이고 따뜻한 안식처라 그런 말 이겠죠.

남편의 시앗에 식모처럼 부려먹는 옛날 상전에. 장소심의 포용심을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나요?

 

그런데 그런 추상성도 어느 정도여야지 시대에 맞지 않게 '사모님'이라며 허리를 굽신거리고 그 집 딸에게 '애기씨'라며 존대를 하는 모습은 포용심이 아니라 하영춘의 말대로 노예근성 입니다. 품어주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자식 보다 어린 주인집 딸에게 뭐하는 짓인가 싶더군요. 드라마 속 배경인 경주시는 개발제한 때문에 높은 고층 빌딩도 드문 곳이지만 정서적으로 50년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년 내내 관광객들이 붐벼서 화려한 풍경도 많은 곳이 경주죠. 대한 민국 어디에서나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요즘에 뇌물도 아무 생각없이 받아먹을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식의 묘사는 상당히 거슬리더군요.

도시와 정서적으로 차이나는 시골이 있긴 합니다. 제 고향은 80년대 초반까지 전기가 설치되지 않았고 특정 가문 집성촌이라 50년대에는 모시던 양반가의 아들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할머니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도시에서는 이미 신분제의 흔적을 지워갔지만 평생 시골에 살던 그 할머니에게는 젊은 시절 모시던 상전이 할머니의 가족들을 먹여살려준 고마운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상전을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다는 면에서 미덕인지 모르지만 그 할머니의 자식들이 새파랗게 어린 남자애에게 허리 굽히는 어머니를 보며 느꼈을 기분은 한마디로 '엿같다'였겠죠.

 

전화받을 때 조차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장소심. 해원을 '애기씨'라 부르는 엄마 보는 심정이 어떨까?

 

물론 80, 90년대까지만 해도 사는 곳이 한 사람의 정서와 큰 관계가 있었습니다. 몇키로를 달려야 도서관이나 서점같은 '문화'적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시골에서는 상대적으로 피자가게나 엘리베이터같은 것들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대화를 나눠본 이 곳의 초등학생 아이 하나는 10살인데 아직 에스칼레이터를 타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정서적으로 차이를 보일 수 있는 환경인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동네 아이들이나 할아버지들 역시 TV를 보고 인터넷을 할 줄 아니까 도시 아이와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은 없어도 적어도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강물(김단율)이의 나이어린 고모, 삼촌인 강동주(홍화리), 강동원(최권수)이 강물이에게 지나치게 하대하며 해라 마라 하는 것도 경우에 어긋나죠. 집성촌의 경우 항렬이 높은 6촌, 8촌이 조카 보다 더 어린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그럴 때는 상호 존대를 하던가 해서 나이많은 아랫사람에게 창피를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실제로는 삼촌 사이도 아니고 사촌 동생들인데 집안 질서를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도 웃긴 일이죠. 장소심 여사의 포용심은 옛날 상전의 심술이나 경우에 맞지 않는 서열까지 모두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비합리적인 것 투성이란 뜻인지 참 갑갑 하기만 하네요.

시대가 바뀌면 고향도 변하는게 맞다. 어머니의 희생과 불합리를 모두 받아주는 것만 고향인 것은 아니다.

 

속된 말로 '쌍팔년도' 시절의 고향은 언제 돌아와도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떠난 사람을 반겨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고향의 의미도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첩과 본처가 한집에서 사는 풍경을 요즘도 심심찮게 TV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좀 어이없기도 했습니다. '콩가루 집안'이란 손가락질 당연한겁니다. 그런 불합리가 모두 용납되던 시절은 '참 좋은 시절'이 아니라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시하던 시절이란 생각은 안해본 걸까요? 부모란 존재는 자식의 잘못과 부족함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존재들이지만 우리 시대에도 비정상적인 부분까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고향'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요? 평소 매우 좋아하는 배우 윤여정의 연기가 아깝기만 합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