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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사료에 적히지 않은 야사가 정설인 것처럼 떠도는 경우가 많은데 때로는 적혀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종교적 기적을 적은 사료나 알에서 사람이 태어났다는 등의 일종의 상징적인 신화들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의 하나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이라 쳐도 현대인의 관점에선 신빙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기 마련입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실린 몇가지 이야기들 중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 이야기도 대표적으로 진실성을 의심받는 기록 중 하나입니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들이 있지만 선화공주의 이름이 적힌 사서는 삼국유사 뿐이라고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여러 유물과 사료에서 선화공주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제와 신라가 혼사를 맺었단 근거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부여장이라는 이름의 백제 무왕은 혜왕과 법왕이 2년 만에 죽자 즉위하고 신라와 자주 충돌하는 등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곤 했습니다. 그런 무왕이 어째서 신라공주와 결혼했는지 도무지 뾰족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죠.
결정적으로 2009년 발견된 미륵사지의 금제사리봉안기(奉安記)의 기록은 선화공주와의 혼인설에 큰 타격을 주고 맙니다. 629년 완공된 미륵사의 창건과정을 적은 이 봉안기에는 사택적덕의 딸이자 백제 왕후인 사택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백제 무왕의 아내는 선화공주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의 왕후는 신라인이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었단 것입니다. 이는 무왕의 다음 왕인 의자왕의 모후까지도 사택씨로 바뀔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기 이전에도 선화공주와의 결혼설은 사실이 아니란 의견이 많았습니다. 확실한 건 법왕의 서자라고도 하고 위덕왕의 아들이라고도 하는, 속어로 '빽없는' 무왕이 왕위에 오를 때 도움을 준 결혼이었다는 점인데 그게 과연 신라의 공주와의 혼인이었겠느냐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서동요를 불러 선화공주를 차지한 무왕은 왜 그렇게 신라를 자주 침공했을까요. 적국의 딸인 선화공주를 인질로 삼은 것이 아닌 이상 납득할만한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드라마 '계백'에 등장하는 설정은 물론 실제 사료와도 좀 다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백제의 왕을 '황제'라 칭한 것도 그렇지만 백제 후기 대성팔족이 아무리 강성하다지만 탁월한 정치력을 보였다는 무왕이 다소 무력한 왕으로 그려지는 점도 사료와는 맞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것 외에도 드라마는 이래저래 극적인 연출을 위해 많은 걸 편리하게 처리했지만 가장 탁월하게 설정된 건 역시나 설화 속 선화공주와 기록이 남은 왕후 사택씨를 적절히 창작해낸 점입니다.
선화공주가 백제의 왕후였는데 백제 내 극우파들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의자왕은 사택씨를 어머니로 두고 자랐다. 그렇게 해두고 나면 설화를 믿던 사람들에게도 사료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만족할만한 결과를 줄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 있던 학설에 의하면 무왕이 혼인한 선화공주가 극중 사택비일 가능성도 아주 높다고 합니다. 무왕은 신라왕실과 혼사를 맺은 적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지요. 일연도 삼국유사 중에서 고서에 '무강'이라 적힌 왕의 이야기지만 '무왕'이라고 고쳐쓰고 있습니다. 기록도 정확치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발굴된 봉안기의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테니 선화공주 이야기는 다시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해내려오는 설화일 뿐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선화공주가 왕후가 아닌 두번째 부인이었을 가능성, 또 왕후였던 선화공주가 죽고 사택씨가 두번째 왕후가 되었거나 처음부터 무왕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왕의 이야기였는데 전해지는 동안 바뀌었던지 선화공주가 본래 사택씨의 또다른 이름이나 호칭인데 이야기가 와전되어 신라의 공주로 변해버렸던지 여러가지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봉안기가 발굴되기전에도 사실 선화공주가 백제 유력한 집안의 딸이란 주장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자이긴 하나 뒤를 보아줄 친족이 없었던 무왕이 백제에서 제일 정치적 파워가 쎈 집안의 딸, 즉 공주 못지 않은 위세를 자랑하던 집안의 셋째딸을 아내로 맞고 그 처가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겠느냐는 추측 말입니다. 신라의 세력을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건 현대인의 관점으로도 역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차라리 당시 강성했다는 대성팔족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는 것이 무왕에게 훨씬 유리했을 것입니다.
마를 파는 아이, 서동요의 이야기가 퍼져나가면서 훨씬 더 극적인 이야길 위해서 사택씨를 당시 원수 국가였던 신라의 공주로 바꾼 게 아니겠냐는 이 주장이 어쩐지 설득력있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확실한 건 극중 사택비의 표현대로 무왕은 상당히 영악하고 정치적인 성격으로 열악한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만들 줄 아는 노련한 왕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왕이 로맨스에 빠져 왕족에게 시달리는 약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건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만약 그 가설대로 사택씨가 선화공주라면 처음부터 드라마 '계백'에서 묘사된 선화황후와 무왕의 비극적인 로맨스는 없었던 셈입니다. 오히려 봉안기의 기록대로 사택왕후와 무왕의 오래도록 이어진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죠. 600년에 즉위한 무왕이 629년에 미륵사 완공, 641년에 사망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부부로 살았다는 뜻이 되거든요. 물론 극중 설정대로 선화공주가 죽고 재혼한 여성이 사택씨라면 이 봉안기는 비극의 증거가 되는 셈이기도 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간첩을 조작하는 사건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봅니다. 무진(차인표)을 세작의 일원으로 처벌하는 사택비(오연수)와 무왕(최종환), 선화황후(신은정)의 갈등은 의자의 운명을 바람 앞의 등불로 만들고 봅니다. 한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 사택비의 질투가 결국 무진과 계백의 삶을 가져오게 했고 먼 미래의 복수를 꿈꾸게 만들었습니다. 어린 의자왕은 다시 백제 왕실로 돌아가 어머니를 죽게 한 사택적덕(김병기)과 사택비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사택비가 백제 황후가 되고 의자왕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백제의 버려진 왕자가 되어 생존을 위한 전쟁을 벌여나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꿰뚤어보는 사택황후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꾸준히 문안을 가고 바보인듯 멍청이인듯 동생 교기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의자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백 역시 어머니를 잃은 채 아버지와 함께 자라다 갖은 고생을 하게 되겠지요. 의형제를 맺게 될 두 사람의 적은 사택비와 백제 귀족 일족들입니다.
세작으로 몰린 선화황후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무왕이 대좌평 사택적덕에게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의자왕은 어머니와 자신을 지키지 못한 그런 무력한 아버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표현 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나약한 아버지를 보며 강력한 왕권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 의자왕이 꿈꾸는 왕위, 백제의 모습은 강력한 왕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왕의 모습이겠지요. 계백 보다도 어쩌면 더욱 궁금한 캐릭터이니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들이 있지만 선화공주의 이름이 적힌 사서는 삼국유사 뿐이라고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여러 유물과 사료에서 선화공주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제와 신라가 혼사를 맺었단 근거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부여장이라는 이름의 백제 무왕은 혜왕과 법왕이 2년 만에 죽자 즉위하고 신라와 자주 충돌하는 등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곤 했습니다. 그런 무왕이 어째서 신라공주와 결혼했는지 도무지 뾰족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죠.
결정적으로 2009년 발견된 미륵사지의 금제사리봉안기(奉安記)의 기록은 선화공주와의 혼인설에 큰 타격을 주고 맙니다. 629년 완공된 미륵사의 창건과정을 적은 이 봉안기에는 사택적덕의 딸이자 백제 왕후인 사택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백제 무왕의 아내는 선화공주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의 왕후는 신라인이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었단 것입니다. 이는 무왕의 다음 왕인 의자왕의 모후까지도 사택씨로 바뀔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기 이전에도 선화공주와의 결혼설은 사실이 아니란 의견이 많았습니다. 확실한 건 법왕의 서자라고도 하고 위덕왕의 아들이라고도 하는, 속어로 '빽없는' 무왕이 왕위에 오를 때 도움을 준 결혼이었다는 점인데 그게 과연 신라의 공주와의 혼인이었겠느냐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서동요를 불러 선화공주를 차지한 무왕은 왜 그렇게 신라를 자주 침공했을까요. 적국의 딸인 선화공주를 인질로 삼은 것이 아닌 이상 납득할만한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극중 사택비가 선화공주일 가능성도 높다
드라마 '계백'에 등장하는 설정은 물론 실제 사료와도 좀 다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백제의 왕을 '황제'라 칭한 것도 그렇지만 백제 후기 대성팔족이 아무리 강성하다지만 탁월한 정치력을 보였다는 무왕이 다소 무력한 왕으로 그려지는 점도 사료와는 맞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것 외에도 드라마는 이래저래 극적인 연출을 위해 많은 걸 편리하게 처리했지만 가장 탁월하게 설정된 건 역시나 설화 속 선화공주와 기록이 남은 왕후 사택씨를 적절히 창작해낸 점입니다.
선화공주가 백제의 왕후였는데 백제 내 극우파들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의자왕은 사택씨를 어머니로 두고 자랐다. 그렇게 해두고 나면 설화를 믿던 사람들에게도 사료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만족할만한 결과를 줄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 있던 학설에 의하면 무왕이 혼인한 선화공주가 극중 사택비일 가능성도 아주 높다고 합니다. 무왕은 신라왕실과 혼사를 맺은 적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지요. 일연도 삼국유사 중에서 고서에 '무강'이라 적힌 왕의 이야기지만 '무왕'이라고 고쳐쓰고 있습니다. 기록도 정확치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선화공주는 사택적덕의 딸이 아니었을까
이 봉안기가 발굴되기전에도 사실 선화공주가 백제 유력한 집안의 딸이란 주장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자이긴 하나 뒤를 보아줄 친족이 없었던 무왕이 백제에서 제일 정치적 파워가 쎈 집안의 딸, 즉 공주 못지 않은 위세를 자랑하던 집안의 셋째딸을 아내로 맞고 그 처가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겠느냐는 추측 말입니다. 신라의 세력을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건 현대인의 관점으로도 역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차라리 당시 강성했다는 대성팔족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는 것이 무왕에게 훨씬 유리했을 것입니다.
2009년 발굴된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만약 그 가설대로 사택씨가 선화공주라면 처음부터 드라마 '계백'에서 묘사된 선화황후와 무왕의 비극적인 로맨스는 없었던 셈입니다. 오히려 봉안기의 기록대로 사택왕후와 무왕의 오래도록 이어진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죠. 600년에 즉위한 무왕이 629년에 미륵사 완공, 641년에 사망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부부로 살았다는 뜻이 되거든요. 물론 극중 설정대로 선화공주가 죽고 재혼한 여성이 사택씨라면 이 봉안기는 비극의 증거가 되는 셈이기도 합니다.
피빛 각오를 다지는 의자왕의 생존기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간첩을 조작하는 사건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봅니다. 무진(차인표)을 세작의 일원으로 처벌하는 사택비(오연수)와 무왕(최종환), 선화황후(신은정)의 갈등은 의자의 운명을 바람 앞의 등불로 만들고 봅니다. 한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 사택비의 질투가 결국 무진과 계백의 삶을 가져오게 했고 먼 미래의 복수를 꿈꾸게 만들었습니다. 어린 의자왕은 다시 백제 왕실로 돌아가 어머니를 죽게 한 사택적덕(김병기)과 사택비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아역들이 출연(의자, 은고, 계백, 초영)
세작으로 몰린 선화황후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무왕이 대좌평 사택적덕에게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의자왕은 어머니와 자신을 지키지 못한 그런 무력한 아버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표현 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나약한 아버지를 보며 강력한 왕권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 의자왕이 꿈꾸는 왕위, 백제의 모습은 강력한 왕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왕의 모습이겠지요. 계백 보다도 어쩌면 더욱 궁금한 캐릭터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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