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계백

계백, 패망한 나라의 슬픈 영웅은 왜 주인공이 되었을까

Shain 2011. 8. 2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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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패망한 나라이기 때문에 드라마 '계백'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지 않으리란 건 뻔한 일입니다. 최근까지 술과 연회를 즐기는 폭군에 실성한 사람처럼 묘사되던 의자왕(조재현)도 그렇고 신라군과의 전투에 패한 계백(이서진)이 그랬고, 또 의자왕과 함께 연회를 즐겼다는 타락한 여성의 상징 은고(송지효)가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후대에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데 어떻게 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바랄 수 있을까요. 그래서였는지 처음부터 이 드라마는 주요 캐릭터를 약간은 우울한 분위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자왕은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 무왕(최종환) 조차 믿지 못하고 어머니 선화황후의 위패를 태우는 등 남들 보기에 갖가지 미친 짓을 해가며 눈물을 삼키는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속에 쌓인 울분이 많은 캐릭터라 언젠가는 그런 성격이 광기로 터져버리지 않을까 안타까운 캐릭터죠. 은고는 태어날 때부터 쌓인 한 때문에 대행수가 되고 사택황후(오연수)의 심복이 되는 캐릭터로 모든 인생을 복수에 바친 캐릭터입니다. 꼼꼼하고 치밀한, 또 목적을 위해 감정을 희생하는 그런 여인이 왕비가 된다면 의자왕의 안식처가 되어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가장 우울한 인물은 계백입니다. 계백은 태어나기전부터 죽을 때까지 의자왕에게 모든 걸 빼앗기는 인물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했을 때 아버지 무진(차인표)은 오로지 선화황후와 의자왕에게 모든 시간을 바쳤습니다. 자신이 태어날 때에도 선화황후를 죽이려는 위제단 때문에 멀리 도망치다 어머니를 잃어야 했습니다. 태어나고 나서는 자신의 의붓어머니 을녀(김혜선)과 형을 잃어야했고 결국엔 의자왕자가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야 맙니다.

의자왕자로 인해 부모를 잃고, 노예로 살게 되는 등 인생을 빼앗기고 최후에는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기고 스승과 동료를 잃고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가족들까지 죽여야했던 계백의 운명. 최고의 불행을 타고난 이 남자, 마치 의자왕의 그림자무사처럼 어두운 모든 운명을 대신 짊어지는 이 남자가 어디까지 빼앗기고 참아야하는 걸까요. 그런 개인적인 희생과 헌신을 모두 쏟아부을 만큼 백제를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패망한 나라의 군주와 장군이 주인공

생각해보면 영웅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꽤 많았습니다만 패망한 나라의 군주가 주인공이 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미쳐가야했던 공민왕과 이상을 꿈꾸던 신돈의 이야기를 그린 사극도 있었지만 역사는 항상 승자의 것이라 그런지 망한 나라의 장군이나 왕이 묘사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에 묘사된 인물 중에서 계백처럼 패자임에도 그 영웅성과 남다름이 묘사된 사람도 드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투를 앞두고 가족을 모두 죽여버렸다는 그의 결연함이나 소년 화랑을 살려주었다는 일화 등은 적군 신라의 눈에도 그가 대단해보였다는 뜻이 됩니다.

드라마 '계백'에서 묘사되는 의자왕과 계백, 은고의 운명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한 나라가 어떻게 망해갔고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졌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다 보니 왜 그들이 영웅적이며 기억에 남을만한 인물임에도 '패자'가 되었는지 설득력있게 그려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선택된 계백의 이미지는 '희생'입니다. 왕을 위해 나라를 위해 모든 인생을 투자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답게 자신도 모든 삶을 나라에 던지는 과정을 비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중 '계백'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얻은 삶과 사람들을 모두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계백의 사람들도 그렇지만 앞으로 등장할 계백의 친구들과 동료들, 부하들 모두가 백제 앞에서 또는 전쟁 앞에서 사라져갈 운명입니다. 거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자왕자와 무왕, 선화황후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한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모두 왕의 일가와 백제를 위해 사라져갈 운명입니다. 사서에 기록된 그의 인생도 참 비장하지만 캐릭터로 구현된 그의 인생은 너무도 그 극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신라에서 생구(포로)로 잡혀 있을 시절 만난 성충(전노민), 백제의 충신이라는 흥수(김유석), 백파(조경훈), 포득(윤원석) 등의 모든 인물들이 백제의 흥망과 함께 사라져갈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 성충과 흥수는 특히 의자왕에게 처벌되는 운명이라고 하니 '계백'이라는 백제의 영웅이 견뎌야할 고난은 한 인간이 감내할 수준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도 살아남지 않는다니,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이 엄습하는 걸 보니 무섭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자신의 인연 하나도 허락되지 않은 이 슬픈 영웅을 묘사하고자 하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요. 더군다나 현대의 사람들은 영웅, 그것도 역사에 길이 남는 승리의 영웅들에게 시선을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훗날 최고의 독재로 평가되는 최근 드라마 '공주의 남자'로 재평가 되는 수양대군이 의인이 아닌 권력에 눈먼 악마로 재조명되듯 언젠가는 그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사람들은 일단 빛나는 영웅에 주목하기 마련입니다.

현대사회가 '계란으로 바위치는' 바보같은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작은 힘으로 쉽게 깨트릴 수도 없고, 어차피 내 힘으로 넘어설 수도 없고 이겨낼 수도 없는 것들, 안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평생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끊임없이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에 살기 때문은 아닐까요. 의자왕과 계백에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가 사택씨를 비롯한 백제의 강성 귀족이란 점은 많은 부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사택황후를 경악하게 만든 의자의 생존

일단 의자왕자는 계백의 희생을 가장 먼저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은고 역시 계백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계백과 함께 백제의 미래를 도모하며 희생을 당연히 받아들일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세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사택씨들에 대한 복수이지만 그 이후의 백제가 외세의 침략을 받을 땐 감히 자신들의 힘으로 깨기 어려운 벽에 부딪힐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여튼 지금의 그들은 미래를 모르는 듯 기존의 세력자였던 사택황후와 교기왕자(진태현)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체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며 '이번에도 살았구나'라고 웃는 의자왕자와 은고와 사택황후, 의자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표정이 변한 계백, 이번주에는 어떤 고통이 주인공들을 괴롭힐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아무리 희생하는 역할이고 빼앗기기만 하는 인생이라지만 계백의 삶에도 웃으며 죽어갈 수 있는 기쁜 기억 하나쯤은 심어주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말만 앞세운 정치인들이 많은 시대, '희생하는 영웅'이 필요한 시대라 그런지 마음 한편이 묵직하면서도 안쓰러운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 이 글은 드라마 '계백' 홈페이지에 동시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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