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경처 신덕왕후 난 이성계의 첩이 아니다
풋내기 정치인 정도전(조재현)의 좌충우돌은 어떤 면에선 불편한 느낌도 줍니다. 극중 서른 네 살의 정도전은 수련하는 학생이 아닌 한사람의 성인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젊다기 보단 장년층입니다. 10대 중후반에 결혼하는게 당시 풍습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인의 환갑을 축하하는 등 평균수명이 지금 보다 한참 짧았던 걸 생각하면 40대 중반의 현대인과 비슷한 위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19살에 큰아들을 낳았으니 벌써 자식도 많이 자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정을 찾고 일가를 이루기 시작할 나이에 정치인들과 거칠게 충돌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도 보통 성격은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정도전을 그 나이까지 끊임없이 분노하게 한 동력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정도전이 시대를 앞선 학자이자 과격하고 개혁적인 정치인이라 합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서자로 태어난 정도전에게 성공에 대한 욕망이 있었노라 평가 합니다. 집안의 장자 대접을 받은 정도전의 정치 이력을 보아 큰 차별을 받았는가는 의문이 있지만 정도전이 차별을 받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권문세족이 아닌 지방 호족 세력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과 함께 소위 '서자 세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신덕왕후와 그의 아들 이방석입니다.
어제 방송에서 잠깐 등장한 신덕왕후(이일화)는 간만에 개경에 온 이성계(유동근)와 이지란(선동혁)에게음식을 대접하고 자신을 둘째 형수라 부르는 이지란의 말에 표정이 변합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귀족은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언제까지 자신을 개경에 혼자 둘 것이냐 하소연합니다. 또 이지란이 자신을 '둘째 형수'라 불렀다며 '소첩이 언제 영감님의 후처로 들어왔던 것입니까'라고 한마디합니다.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는 무려 21살이 차이납니다. 전에는 신덕왕후가 이성계의 첩이거나 전처 한씨가 죽은 후 새로 들인 부인(후처)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조선시대의 사서를 뒤져보면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인 한씨를 향처(鄕妻)라 표현하고 두번째로 들인 부인인 강씨를 경처(京妻)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첩이 아닌 부인을 따로 두는 경우가 있었는데 고향에서 젊었을 때 결혼한 아내를 향처라 했고 고위 관리가 되어 개경에서 결혼한 아내를 경처라 불렀습니다. 요즘이나 조선시대에는 조강지처라 하여 먼저 결혼한 아내의 서열을 높이 쳐주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는 개경에 사는 귀족 세력이 더 강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강하여 경처의 위세가 더 등등했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중전 자리에 앉힌 것은 신덕왕후 강씨입니다. 신의왕후 한씨는 6남 1녀를 낳았지만 개국 일년전에 이미 세상을 떴고 경처 강씨는 첩이 아닌 정실이기에 왕후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었습니다. 향처였던 한씨는 절비로 추존되고 자식들 즉 이방원을 비롯한 아들들은 '군'의 지위를 받고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됩니다. 정실인 것도 사실이지만 정치적으로 이성계는 강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신덕왕후가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 세력의 지지를 받았기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한씨의 자식들은 반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성계를 보좌해 한 나라를 개국할 수 있도록 격려한 신덕왕후는 어쩌면 태종 이방원이 평생 상대했던 여러 정적들 중 가장 힘든 라이벌이었는지도모릅니다. 첩도 아닌 이성계의 진짜 아내였다는 점이 말입니다. 정도전과 이방석을 제거한 태종에게 이성계가 분노한 것도 그런 부분이겠죠. 그만큼 신덕왕후라는 존재가 이성계에게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태종도 사후에 신덕왕후 옆에 묻히고 싶어했을 정도로, 정치적 정신적으로 부인 역할을 한 여성입니다. 극중의 경처 강씨에게도 이성계에 대한 야심이 엿보이고 있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대로 이방원은 이런 신덕왕후 강씨를 적대시했습니다. 자신의 형제들을 서자 취급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돌려줘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하고 신덕왕후의 아들을 모두 죽이고 서자로 기록합니다. 경처와 향처의 자존심 싸움이 자식들대로 이어진 셈입니다. 혹자들은 이방원의 신덕왕후에 대한 분노가 조선 시대의 최대 폐단 중 하나인 적서차별을 초래했다고 지적합니다. 태종 이방원이 절대왕권에 집착한 만큼 직계 후손 혹은 장자로 이어지는 권력구도에서 후처, 첩의 아들인 서자들을 애초에 제거하고 싶었던 의도가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아무튼 나는 후처나 첩이 아닌 본처라는 강씨의 자존심은 정도전의 운명에도 이방원에 운명에도 중요한 역할을 끼칠 것입니다. 이성계의 본처로 정실 대접을 받고 싶은 강씨나 나이어린 새어머니를 어머니로 불러야하는 이방원의 자존심이 조선 개국이라는 목적 앞에서는 한때 협력할 것이나 끝끝내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으리란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남편의 사투리까지 단속하는 강씨는 분명 평범한 귀족의 딸은 아닙니다. '둘째 형수'라는 말에 흠칫하면서도 금새 웃으며 사람들을 대접하는 강씨의 표정을 주목해야할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