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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씨 5

계백, 황후가 되려 스파이가 된 은고 여자 때문에 나라가 망하다?

많은 사람들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사자성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란 뜻인데 얼마나 미모가 뛰어나면 한 나라가 망해도 모를 만큼 빠져들 수 있을까. 경국지색은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자성어이기도 합니다. 또 실제로 '한 나라' 정도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여성에게 빠져 한 가정이 붕괴되고 기업이 무너지는 경우도 없잖아 찾아볼 수 있으니 사람들은 '여자 잘못 만나면 팔자가 꼬인다' 내지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쉽게 내뱉기도 합니다. '아내의 유혹'같은 TV 드라마에서도 자신의 복수를 위해 한 집안을 풍비박산내는 여자 이야기가 인기를 끌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실제 '나라를 망하게 한 여자'라는 평을 받는 여자들은 대부분 꽤 오래전 인물들입니..

계백, 역모죄에도 교기와 사택황후가 살아난 이유?

현존하는 사료에 기록된 백제사는 매우 짧기 때문에 계백'처럼 30부가 넘는 드라마를 제작하자면 각종 사료와 유물이 다 동원되기 마련입니다. 일단 우리가 흔히 아는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자(조재현)의 어머니로 등장한 선화황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기한 이야기와 종교이야기를 다수 적은 삼국유사대로 설정한 것일 뿐입니다. 또 무왕(최종환)이 최후까지 함께 한 아내가 사택황후(오연수)라는 건 미륵사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나온 기록 때문에 유추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자와 어제 방송에서 쫓겨난 교기 왕자(진태현)의 어머니가 다르다던가 두 사람이 권력 다툼을 했다, 또 은고(송지효)가 의자왕의 왕비였다는 점 등은 무엇을 근거로 설정한 것일까요. 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을 기본으로 창작된 것입니다...

계백, 자중지란으로 사택황후를 잡는 은고와 계백

이야기거리도 많고 사람도 많았던 중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떨쳤던 황제는 누구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진나라 황제 진시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과묵하고 신중했다던 진시황제는 성인이 되어 엄격한 사법권과 무자비한 성정으로 여기저기 악명을 떨쳤으며 말년에는 감히 영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기도 하고 진흙병사들을 세워 놓은 지하나라, 엄청난 규모의 황제릉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진시황제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역사상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 살아있을 때는 형가의 암살도 피할 만큼 조심스레 권력을 지켰던 그의 죽음이 몹시도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에 기생하며 그에게 아부하던 신하들은 다음 권력을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해 황제의..

계백, 혼절한 사택황후 아군을 가리기 위한 교활한 계책

원래 추석은 신라 유리왕 때의 길쌈 놀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백제나 고구려 드라마에서 추석 명절 등을 묘사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제에는 대신 절기 마다 천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국가 행사가 있었습니다. 보통 봄, 여름, 겨울 등 네 계절 마다 한번씩 제사를 지냈는데 기록을 보아서는 주로 봄(정월이나 2월)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더욱 크게 치른 것 같습니다. 물론 곡식을 수확하는 10월에도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만백성이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중요시 여기던 시대이니 농사를 짓고 거둘 때 올리는 기원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료 부족으로 백제사의 많은 부분이 암흑 속에 있기는 하나 대성팔족을 비롯한 사택씨들의 힘이 강력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

계백, 선화공주와 서동의 로맨스 정말 비극일까

때로는 사료에 적히지 않은 야사가 정설인 것처럼 떠도는 경우가 많은데 때로는 적혀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종교적 기적을 적은 사료나 알에서 사람이 태어났다는 등의 일종의 상징적인 신화들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의 하나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이라 쳐도 현대인의 관점에선 신빙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기 마련입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실린 몇가지 이야기들 중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 이야기도 대표적으로 진실성을 의심받는 기록 중 하나입니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들이 있지만 선화공주의 이름이 적힌 사서는 삼국유사 뿐이라고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여러 유물과 사료에서 선화공주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제와 신라가 혼사를 맺었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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