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빛과 그림자

70년대, 연예계의 '빛과 그림자'를 묘사하기 가장 적절한 시대

Shain 2011. 12. 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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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겪어본 적 없어서 꽤 오래전에 일 같지만 일제강점기는 불과 70여년전입니다. 한국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전쟁고아들이 굶던 시절도 기껏해야 60년전이구요. 갓 스무살을 넘긴 사람들이나 서른을 넘긴 세대들에겐 까마득히 옛날같겠지만 그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이 아직까지 동시대에 살아 있습니다. 50년대, 60년대, 70년대가 현대 한국의 초석이 마련된 시기이니 어찌 보면 그 또래들은 현대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셈입니다. 이 드라마 '빛과 그림자'를 보며 옛날엔 정말 그랬다 내지는 저건 엉터리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도 한 세대들이죠.

물론 '빛과 그림자'가  76-70년대에 붐이 일었던 쇼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복고'는 단순히 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하는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극중 무대는 70년대이고 사람들이 당시 유행했던 여자들은 나팔바지를 입고 남자들은 올백으로 머리를 넘기고 뛰어다니고는 있습니다만 순양이나 무령같은 이름의 가상 도시, 유채영(손담비), 최성원(이세창)같은 가상스타들이 활약하는 그런 시대적인 환경은 진짜 '복고'를 그린다기 보다 이야기를 위한 밑거름으로 깔아두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당시 유행했던 음악을 중간중간 사용하는가 하면 김추자, 화춘화, 남진같은 실존인물들의 대역을 투입해 당시 분위기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거기다 70년대 초반에 연예인들의 지방 공연이 인기였다는 건 '팩트'입니다. 연예인들이 TV 무대 보다 현금으로 목돈이 쥐어지는 지방  쇼단 공연을 너무 좋아한다며 기사가 실렸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서울대 출신으로 유명했던 최희준도 당시 지방공연에 자주 출연했다는 기사가 남아 있습니다. 요즘은 예전 보다 좀 낫지만 그때는 TV도 드물고 전기도 안 들어오던 곳이 있을 때이니 지방공연에 환호할 만한 시절이었습니다.

쇼단 스타 중에는 극중 서승만이 연기하는 '쟈니보이'나 '앵두보이'의 모델이 된 체리보이같은 사람들도 있었고, 이미자와 그 남편이 같이 운영하던 '다이아몬드 쇼단', 패티김같은 가수가 속해 있던 '스타더스트'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윤복희는 본래 가수 혜은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낙랑 쇼단' 출신이라고 하구요. 악단이나 쇼단이 요즘의 기획사 또는 매니저같은 역할을 해서 극중 신정구(성지루)처럼 사기성 농후한 무대로 종종 만들고 세븐스타 쇼단의 노상택(안길강)처럼 무한한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던 그런 시대가 70년대입니다.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로 유명한 영화 '하녀'는 본래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작품입니다. 영화에서 묘사된 시대적 배경은 실제 60년대 한국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엄청나게 큰 밥그릇에 꽉꽉 눌러 담은 '머슴밥'을 먹고 국을 제외한 다른 반찬도 잘 안 먹는 부분 등은 유사한데 당시 중산층 가정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던 '식모'를 주인공들은 의도적으로 '하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50, 60년대 일자리도 없고 마땅히 할일도 없었던 사람들은 살만한 집에 종살이를 하러 들어갔고 여자들은 '식모'가 되어 집안일을 거들던 시절입니다.

'빛과 그림자'의 김추자나 유채영은 화려한 조명 안에서 밝게 웃으며 춤추고 노래합니다. 다방에서는 최신 팝이 흘러나오고 신출내기 극단 진행자는 가수 이정혜(남상미)는 팝 하나 못부른다며 홍수봉(손진영)에게 구박받습니다. 최첨단 유행을 즐기고 있는 그 시대에 아직도 주인집 아들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식모 금례(김미경)가 있고 주인집 사모님 박경자(박원숙)는 금례의 아들 차수혁(이필모)까지 종처럼 생각합니다. 때로 무식한 사람처럼 수혁을 윽박지르는 국회의원 장철환(전광렬)은 주먹 잘 쓰는 조명국을 시켜 쇼단의 공연을 방해합니다. 무대 위에 빛이 있어도 주변은 이렇게 암흑천지인 것입니다.



70년대의 어두움 어디까지 묘사할 것인가

연예계의 어두움은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실력과 운이 바쳐줘서 최고의 탑스타로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꿈을 꾸다가도 타고난 한계나 운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예계 주변에서 주저앉는 지망생도 있기 마련입니다. 70년대에도 그 현상은 마찬가지였고 기획사도 없는 어린 스타지망생들이 겪어야할 어려움은 더욱 많았습니다. 최근엔 연예기획사에서 훈련을 시키기도 하고 이런저런 광고 섭외 등도 알아서 해주지만 당시에는 매니저를 두는 가수들은 탑스타들 뿐이었습니다. 쇼단의 막내로 이정혜나 김계순(이아이)처럼 빨래나 청소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죠.

문제는 그런 '막노동'으로 그들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근대에 와서도 연예인을 술자리 기생이나 '딴따라'로 여기는 문화는 사라지지 않아 지역 정치인 또는 건달들이 부르면 술자리에 불려 나가 춤과 노래를 보여주고 때로는 그들에게 향응을 제공해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80-90년대까지도 모 남자 연예인이 유명 정치인의 회갑잔치에 참석했다고 구설에 올랐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해야할 때가 많았습니다. 극중 이정혜와 차수혁은 장철환이 부른 자리에서 마주칠 것 같더군요.

요즘도 연예인들이 '정치색'을 드러내길 꺼려하는 건 이런 문화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인이 상대방을 해꼬지할 목적으로 쇼단 공연을 막기 위해 신정구를 납치하고 주먹을 휘둘러 깽판을 놓는 문화. 연예인들의 무대 공연 초대권을 대량으로 탈취해 선거에 이용하는 문화, 쇼단에게 부적절한 향응을 요구하며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고 나쁜 짓을 궁리하는 고위층, 소문으로만 듣던 그런 일들은 우리 나라에 분명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이런 연예계의 고질적 '어두움'이 아직도 연예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양태성(김희원)이 신정구와 뒷돈 거래를 하는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약장사들처럼 계산도 없이 지방 공연을 가고 아무나 대충 무대에 올리는 주먹구구식 운영도 문제지만 그 '커미션' 관행 역시 두고두고 연예계의 고질병이 되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메뉴는 역시나 쇼흥행으로 성공을 거머쥐는 한남자 강기태(안재욱)의 이야기겠지만 사이드 메뉴로 등장할 연예계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과연 70년대 연예계의 명암을 어디까지 묘사할 수 있을까요.

* 드라마에 맞춰 새로 만든 가요 OST도 좋지만 극중 등장하는 곡들도 시대에 맞춰 리메이크된 곡이었으면 어땠을까요. 강명희(신다은)와 차수혁이 다방에서 만나던 장면에서 흐른 음악은 상당히 어색하긴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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