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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오면, 팜므파탈 김순정의 공감가지 않는 파괴본능

Shain 2012. 1. 1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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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극적인 연출을 위해 제일 많이 활용하는 캐릭터 중 하나가 '악녀' 입니다. 착하기만 해서 밋밋한 주인공을 대성통곡하게 만들고 때로는 복수하리라 이를 악물게 만드는 악녀들은 멜로물이든 가족 드라마든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대활약하곤 합니다. '아내의 유혹'에서 남편에게 복수하겠다며 되살아난 구은재(장서희)의 무리수가 용서받은 건 정교빈(변우민)과 신애리(김서형)의 악행이 너무나 악랄했기 때문입니다. 악녀들은 때로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 삶의 이유와 의욕을 부여하는 사람들같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되갚아주겠다는 일념으로 그 누구 보다 당차고 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속 악녀들 중 최강은 누가 뭐래도 '내일이 오면'의 김순정(김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은 좀 험하긴 해도 고아인 자신을 거두어 친가족처럼 아껴주던 손정인(고두심). 그런 손정인의 동생인듯 딸인듯 입의 혀처럼 굴던 순정은 착하고 여리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손정인의 남편 윤원섭(길용우)을 유혹한 내연녀입니다. 아무도 몰래 아내있는 유부남을 사랑하고 아이까지 낳아 어렵게 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안쓰러움은 잠시 그녀는 속으로 날카로운 비수를 갈고 있었습니다.

두 얼굴의 악녀 김순정에게 모든 걸 빼앗긴 손정인.

드라마 초반엔 돈 밖에 몰라 타인들에게 상처를 주곤 하는 손정인이 악의 축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굶고 자라 가족 모두를 잃어야 했던, 서글픈 과거를 가진 손정인에게 돈은 세상 최고의 가치였고 손정인은 비리를 저지르고 뇌물을 써서라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자식들은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섬찟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독한 여자'의 곁에서 남몰래 윤원섭을 좋아하던 김순정의 연정이 처음에는 딱하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다소 무식한 사업가로 묘사되는 손정인이 건설사업을 하며 이런 저런 비리를 저지르는 동안 김순정은 그녀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해두고 있었습니다. 손정인의 사소한 비밀 하나까지 기록해 두었다가 금감원에 고발하고 정인이 믿고 맡긴 중고 중장비 수출사업을 단독으로 처리하여 정인을 순식간에 장물아비로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순정의 고발로 평생을 걸려 가꾼 정인의 회사는 부도 처리되고 정인은 감옥에 가게 됩니다. 순정이 몰래 숨겨둔 현금과 금괴까지 훔쳐가는 바람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고 말지요.



김순정이 손정인을 흉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순정은 철저하게 손정인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원섭이 자신의 무능함을 느껴 아내에게 섭섭함을 느끼고 속으로 곪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평생을 함께 가꾼 가정인데 순정과의 불륜이 폭로되며 윤은채(서우)와 손정인은 하루 아침에 '아빠'를 잃어버립니다. 은채가 이영균(하석진)과 결혼할 때까지만 멀쩡한 척 버텨보자 했는데 은채의 결혼식 당일 손정인은 수갑이 채워져 잡혀갑니다.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슬픔도 버티기 힘든 판에 힘겹게 세운 회사까지 순정이 꾸민 계략에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순정은 꽤 오랫동안 손정인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겉으로는 정인이 무섭다며 아이까지 가진 걸 들켰을 때 어떤 짓을 할지 몰라 그랬다고 변명하지만 윤원섭의 재산을 재단으로 빼돌리고 정인의 범죄 기록까지 차곡차곡 정리하는 순정의 행동은 자기 보호라기엔 과한 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미혼모의 딸로 자라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을 엄마처럼 거두어준 손정인에게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은 그녀의 착해 보이던 성격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친절하게 전화를 받지만 몰래 빼돌린 돈을 보고 즐거워하는 순정.

아이를 주고 외국으로 가라는 손정인의 요구가 부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채 아버지인 윤원섭과 함께 떠나겠다는 순정의 대답이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순정과 정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상당히 뻔뻔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30년 간 함께 한 손정인을 배신하고 그녀의 남편과 재산을 모두 빼앗는 이유는 단지 하나 '손정인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무섭기 때문'입니다. 순정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서워 정인을 파괴하기로 했다고 변명합니다. 손정인을 철저히 파괴하는 악녀 김순정, 파괴 본능이 이해가지 않고 공감가지 않는 것은 그 이유입니다.

어쩌면 훔쳐온 손정인의 금괴를 침대 위에 늘어놓고 건배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동안 숨겨온 순정의 본성이었습니다. 정인에게 순종하며 유부남 윤원섭에게 순정을 바친 듯 보였던 그녀는 정인의 성공을 곁에서 보고 거들며 정인이 가진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던 것인지도 모르죠. 처음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정인을 대신해 아들을 낳아주고 다음엔 정인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던 남편 윤원섭을 빼앗고 그 다음엔 정인이 거두어주던 사람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자신이 손정인을 대신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순정이 쫓겨나자 따라가는 남편 윤원섭. 순정에게 대부분 속도 있다.

비록 건설사 사장으로서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더러운 부자이지만 자상하고 친절한 남편이 있고 잘 자라준 딸이 있는 손정인은 김순정에게 인생의 롤모델이었을 것입니다. 재산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정인이 성공해 맨주먹으로 시작해 사장이 되었는데 순정이라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까 싶어 탐냈을 수도 있겠죠. 손정인이 감옥에 가자 마자 마치 손정인이라도 된듯 손정모(이승형)에게 지시를 내리는 순정의 모습이 숨겨왔던 본심이었을 것도 같습니다.

경제 범죄로 처벌받기는 했지만 김순정 앞에서 손정인의 죄를 논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손정인을 비난해도 김순정 만큼은 정인에게 영원한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값을 받게 된다는 세상 교훈을 다 떠나서 손정인을 대신해 모든 걸 차지하겠다는 김순정의 욕심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이 부분입니다. 순정을 가족처럼 생각했던 정인을 배신한 순정이 불도저처럼 손정인을 파괴하는 모습은 원시적인 파괴 본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손정인의 것을 깨트려 얻은 가족과 돈 영원할 수 있을까.

'내일이 오면'은 어떤 면에선 불륜과 배신으로 점철된 '막장' 드라마지만 캐릭터 하나 하나는 섬세하게 묘사된 장점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도깨비에 홀릴 수 밖에 없었던 배곯던 고아소녀 손정인의 악착같은 감정은 나름 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만 그녀를 파괴하는 김순정의 심리는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깨트려 자기 것을 얻으려 하는 행동은 그녀가 타고난 팜므파탈 캐릭터란 설명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죄책감도 사연도 없기 때문에 더욱 공감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두 얼굴의 배은망덕한 악녀 김순정이 어떤식으로 몰락하게 될지 그 부분이 나머지 방영분의 핵심이 될 듯합니다. 새삼스럽지만 고두심의 연기는 언제 봐도 감탄스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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