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빛과 그림자

빛과그림자, 손가락질 받고 뺨맞고 궁정동 여자 이정혜의 굴레

Shain 2012. 1. 2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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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미가 맡고 있는 이정혜를 보면 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단아한 여배우들이 떠오릅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같은 미인들이 당시 최고 인기를 끌던 배우들이었고 극중 이정혜처럼 청초한 이미지로 팬들을 사로잡곤 했습니다. 남상미가 가수역치고는 노래를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던 걸로 아는데 본래 이정혜의 역 자체가 배우로 성공하는 캐릭터고 노래를 부르고 무대 공연을 하는건 극중 박노식(박준규)처럼 당시 배우들의 필수코스같은 것이었습니다. 정혜가 왜 필사적으로 못하는 노래를 부르면서까지 스타가 되려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곧 유명 배우가 될 것같습니다.

박노식이 등장하고 최성원(이세창)같은 영화스타 출신 영화감독이 등장했으니 70년대 영화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닐까 싶습니다. 이 드라마의 제목 '빛과 그림자'는 길옥균이 작곡하고 최희준, 패티김이 부른 노래 제목이자 1967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제목이기도 합니다. 워낙 오래된 영화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문희가 여주인공인 고아 소녀 역을 맡았고 폭력배를 벗어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한 남자 이야기로 멜로 액션이라고 하더군요. 이 드라마 내용도 내용이지만 극중 최성원이 찍는 그 영화 내용과 유사할 것 같단 생각이 들지요?

뛰어난 연기로 호평을 받는 이정혜.

70년대는 양적으로 꽤 많은 영화가 제작된 시기로 어찌 보면 한국 영화의 부흥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드라마에서 묘사한대로 강화된 영화법의 부작용이 심각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영화계 버전의 '빛과 그림자'랄까. 드라마 속에서 묘사한 것처럼 많은 한국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영화배우들이 다섯편 이상의 영화에 동시출연하는 건 예사였고 박노식이나 최성원의 자랑처럼 열편 이상을 함께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제작 편수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실망시키는 작품이 다수 제작되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영화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우리가 리메이크를 통해 잘 알고 있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1960)'도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널리 알린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70년대는 수적으로는 상당한 작품이 발표되었지만 질적으로는 쇠퇴기라는 평가를 받곤 합니다. 외화 수입을 위한 숫자 채우기 제작 또는 장철환(전광렬)이 언급하듯 정책 홍보나 특정 목적을 위해 제작된 영화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짜 합작 영화'라는 웃지 못할 현상도 그 시기에 있었죠.



외화 수입을 위해서라면 다섯편 동시 출연 쯤이야

강기태(안재욱)를 사랑하지만 차수혁(이필모)의 경고를 듣고 그를 멀리 하기로 한 이정혜는 최성원, 양태성(김희원)과 함께 '불새가 날다'란 영화를 찍습니다. 당시에는 동시 녹음이 아닌 더빙이 일반적이라 대사를 미리 읽어주고 배우는 그대로 따라하며 약간은 과장된 연기를 펼칩니다. 알고 보니 영화 '빛과 그림자'의 감독인 최경옥도 출연배우 겸 감독으로 영화를 제작했더군요. 실제 당시 풍경이 그랬을지 어땠을 지 모르겠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제작하던 일은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라 알고 있습니다.

영화법에 의해 당시에는 영화사에서 제작한 국산 영화 편수에 비례해 외화 수입 자격을 주었기 때문에 영화사들은 외화를 할당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극중 여배우가 다섯편 동시 출연하느냐 바쁘다고 하자 박노식과 최성원이 열편은 기본이었다고 대답합니다. 남궁원이라는 배우만 봐도 70년 한해에 출연했던 영화가 25편입니다(세어볼 수 있는 것만 세어본 것이니 더 많을 지도 모르죠). 영화사들은 이런식으로 외화 수입을 위한 국산 영화 숫자를 채웠고 외국 촬영된 홍콩영화를 수입해 제작진에 한발을 얹는 식으로 가짜 합작 영화를 만들어 싼값에 의무 편수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궁정동 여자' 정혜에 대한 피에르 유와 강명희의 떨떠름한 반응.

그 바쁜 영화판에 뛰어든 이정혜는 자신의 슬픔을 모두 쏟아붓는 명연기를 펼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부모 얼굴도 모르는 설움도 설움이고 가수가 되겠다며 월남을 다녀오고 무대에서 고생했던 기억도 떠올랐을 법합니다. 무엇 보다 그녀가 겪는 슬픔 중에 가장 서러운 것은 '궁정동 여자'라는 누명입니다. 스타가 되고 싶어 궁정동에 불려갔던 일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겁니다. 각하의 연회에 따라가 노래만 하는 줄 알았는데 기태의 동생 명희(신다은)는 그런 자신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합니다.

궁정동 여성들과 배우들에게 의상을 제작해주는 피에르 유(김광규) 조차 자신을 별스럽게 취급하며 경계하는 모습에 정혜는 서글픔을 느낍니다. 마치 정치인에게 접대를 했다는 소문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던 정모 연예인처럼 그녀를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가 바로 '궁정동' 입니다. 낙하산으로 세븐스타 쇼단에 들어가 유채영(손담비)의 노래를 뺏어갔다는 오해, 경력도 없는 초보가 정치판 '빽'을 믿고 영화판에 뛰어들어 좋은 배역을 따냈다는 오명은 끝까지 그녀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강기태를 애써 외면하는 정혜, 그녀를 따라다닐 꼬리표.

그런 그녀를 아니꼽게 바라 보다 뺨을 날리는 선배 여배우는 그녀가 처한 불행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단역 주제에 주연 배우가 앉는 그 자리에 앉느냐'고 시비를 거는 유명 여배우는 한술 더 떠 '어디서 내숭이냐'며 정혜의 뺨을 때리지만 정혜는 서러워하기는 커녕 잘못했다며 사과를 해야합니다. 앞으로 그녀를 따라다닐 사람들의 시선은 늘 그렇게 차갑고 폭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궁정동 출신의 여배우가 대성공을 했다는 평가는 마치 스캔들처럼 그녀를 뒤쫓아 다닐 것같단 예감이 듭니다.

시나리오 검열과 영화 검열, 이중 검열이 있던 70년대의 영화는 액션 아니면 호스티스 물이었다는 평가도 받더군요. 암울한 정치사의 그늘은 그들의 권력싸움으로 끝이 나는게 아니라 연예계에도 고스란히 반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정혜가 흘리는 눈물은 어찌 보면 환하게 빛나는 한 여배우의 눈물이기도 하지만 속으로 곪아가야했던 시대의 피눈물이기도 합니다. 손미진 사장(이휘향)과 함께 중정 김부장(김병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중정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 강기태. 그의 결심이 빛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정 김부장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한 기태, 둘의 대립을 벗어날까.

물론 손미진 사장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다 장철환이 강기태를 노리고 있으니 장철환의 손아귀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경찰서 등을 통해 빅토리아 영업 정지를 위해 조명국(이종원)이 나섰습니다. 안 그래도 힘든 강기태가 김부장의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고래싸움에 새우등' 처럼 함께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아버지 강만식(전국환)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도, 정혜같은 배우지망생들의 눈물을 바탕으로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도 결국엔 권력을 쥐고 있던 그들입니다. 복수를 다짐하고 홀로서기를 맹세한 그에게 그들의 도움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결국 강기태는 맨주먹으로 그 바닥에서 살아남아 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장철환의 오른팔인 차수혁과 대립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그가 어떤식으로 쇼단으로 성공할지도 궁금하네요. 오늘밤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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