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빛과 그림자

빛과그림자, 기태와 정혜의 70년대식 꾸밈없는 사랑 어쩐지 아슬아슬

Shain 2012. 1. 31. 09:43
728x90
반응형
어찌 보면 촌스러워도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었던 70년대의 문화를 보는 일은 즐겁고 흥미롭습니다. 반면 우울하고 무서웠던 그때의 사건들을 되돌이켜 보는 일은 껄끄럽습니다. 최근 MBC가 총파업 중이라 이 드라마 '빛과 그림자'도 다음주부터 방영에 차질있는 것이 아니냔 말이 있는데 75년경에는 방송국이 아닌 동아일보에 유사한 언론 파업이 있었습니다. 2008년에 신문기사가 중앙정보부에 검열되던 그 시대를 주제로 기자들의 해직 사태를 다룬 '동아일보 해직 기자'란 동영상(EBS '지식채널e'에서 제작한 내용입니다)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시대가 그렇습니다. 유신반대를 외치며 학생 운동에 나섰던 대학생들, 언론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정치 깡패들에게 얻어맞는 기자들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생존을 하고 권력을 따라야하는, 극중 차수혁(이필모)처럼 남모르게 답답한 가슴을 달래는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던 그 엄격한 시대에 깡패는 왜 그렇게 많은지 사업장 하나를 꾸려도 깡패하고 잘 지내야했다는 그 시대. 그 모순덩어리 현실을 강기태(안재욱)는 맨주먹으로 헤쳐가야 합니다.

빅토리아가 영업정지 당하자 한양구락부를 찾아가는 강기태.

마도로스박(박준규)은 촬영장에 조태수(김뢰하)가 찾아오자 자신이 폭행한 일 때문에 보복하러 온 줄 알고 겁을 먹지만 맞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싫었던 조태수는 오히려 마도로스박과 최성원(이세창)을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허리를 굽힙니다. 단따라와 건달은 숙명이라는 신정구(성지루)의 말처럼 당시에는 조폭과 관련된 연예계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밤무대에서 공연하는 연예인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혹은 무대 공연을 무사히 마치게 해주는 대가로 상납을 하거나 돈을 쥐어줘야하는 일은 관례같은 것이었다고 하죠.

그래서 그랬는지 극중 송미진 사장(이휘향)의 빅토리아처럼 나이트클럽 단속도 자주 있던 일 중 하나입니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검색해보면 연예계 깡패를 단속했다는 기사와 나이트클럽이 영업정지 처분이나 시정명령을 받았단 기사를 종종 읽을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는 윗분의 압력으로 영업정지당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당시 영업정지 명령을 받던 주된 이유는 '퇴폐 영업'과 '밤샘 영업'이었습니다. 73년에는 금지된 '고고춤'과 음악으로 퇴폐 풍조를 조장해 영업정지 처분된 업소도 있습니다. 드라마 초반 등장한 '풍전 나이트클럽'도 단골 단속대상이더군요.

* 구락부는 '클럽(club)'을 뜻하는 말로 일본어를 한자로 음역한 말입니다(불란서, 아세아처럼). 한양구락부 한지평 회장 역은 '뿌리깊은 나무'의 최만리, 권태원이로군요.



순수하지만 감성적이던 그때 그 시절의 사랑

그 때 그 시절엔 어쩌면 그리 좋은 노래가 많았는지 '빛과 그림자'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들은 방영 후 한번씩 화제가 되곤 합니다. 통기타 반주에 부르는 순수한 목소리의 가수도 있었고 나이든 어르신 조차 울리고 마는 감상적인 노래도 많았던 그 시절, 기교나 연주 실력은 요즘 가수들이 더 나은지 몰라도 그때 가수들의 풍부한 감정 만큼은 따라갈 수 있는 노래가 드문 것같습니다. 그때는 가요 뿐만 아니라 팝도 그런 경향이 있던 시대여서 그 시절의 팝들은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널리 인기를 끌곤 하지요.

어제 차수혁과 조명국(이종원)이 카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 들렸던 음악은 알 스튜어트(Al Stewart)의 'The Palace Of Versailles(베르사이유 궁전)'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며 프랑스 혁명을 연상한 내용이 인상적인 곡이죠. 양태성(김희원)과 이정혜(남상미)가 다방에 앉아 장철환 이야기를 나눌 때 흘러나온 음악은 린다 론스타드(Linda Ronstadt)의 'Long Long Time'입니다. 두 곡은 80년대까지도 오랜 사랑을 받았던 팝명곡입니다.

서로의 진심을 고백하며 포옹하는 두 사람.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포크송과 팝송, 그 사이에서 차 한잔이 식을 때까지 수줍게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70년대 연인들은 요즘처럼 쉽게 손을 잡거나 그러지 못했다고 합니다. 빵집에서 우유 한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유행했다고 하지요. 낯선 남녀가 선뜻 친밀한 이야길 나누기도 뭣하고 남들 시선도 의식되고 그러니 개중에는 친척아이나 어린 동생을 데이트에 끌고 나오는 여자들도 있었다지요. 젊은 남녀가 꼬마 아이와 함께 데이트하는 모습이 요즘 눈에는 참 별스럽지만 그게 오히려 쑥쓰러움을 없애주기도 했습니다.

꼬마는 때로 눈치껏 빵사달라 과자사달라 떼를 써서 둘의 데이트 시간을 늘려주기도 하고 아저씨가 언니를 좋아한다는, 직접 얼굴 보고 하기 힘든 고백을 대뜸 전해주기도 합니다. 데이트에 데려나간 꼬마는 남들 눈에 남녀가 건전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는 증거도 되고 껄끄러움을 없애주는 중간 역할도 해주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보면 참 번거롭고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은근하고 열렬한, 그 시대 만의 연애 방식이지요. 극중 기태와 정혜도 그런 시대의 잔잔한 사랑을 순수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연인의 발목을 잡는 제약이 어쩜 그렇게 많은지 정혜에게 새겨진 궁정동 여자란 주홍글씨는 왜 그렇게도 무섭고 두렵기만 한지 기태에게 위험이 닥칠까봐 표현할 수 없던 사랑을 고백한 정혜와 자신을 피하려는 정혜의 진심을 알고 그녀를 구하러 뛰어든 기태의 사랑은 풋풋하지만 아슬아슬합니다. 보는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연기, 배우 남상미는 극중 가수가 아닌 영화배우로 역할을 바꾸면서 눈물 연기의 장점이 제대로 드러나는 듯합니다. 노련한 연기자 안재욱과 남상미의 키스신은 마치 진짜 연인인듯 최고의 호흡을 보여주더군요.

기태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정혜의 고백은 애틋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원하게 된 남자 기태가 장철환에게서 자신을 구하러 오자 그제야 진심을 고백한 정혜는 한층 더 용감한 사람이 된 듯합니다. 그러나 기태를 정혜를 사랑하는 수혁의 질투와 강기태를 어떻게든 무너트리려는 장철환의 음모, 그리고 기태를 어떻게든 갖고야 말겠다며 불나방처럼 궁정동으로 뛰어든 유채영(손담비)이 가세하면 강기태와 정혜의 사랑은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처럼 늘 함께 있을 수만은 없게될 지도 모릅니다.

정혜와 기태의 사랑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 수혁과 채영.

그러고 보니 어제 방영분에서는 장철환과 송미진도 잠깐 등장하고 중정 김재욱 부장(김병기)이 등장하지 않았군요. 거의 처음으로 연예계와 빛나라 쇼단 이야기 보다 이정혜와 강기태의 사랑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 것 같습니다. 사랑타령이 지겹다는 평가도 있지만 강기태의 인생을 생각하면 배우와의 사랑도 전체 이야기에 중요한 부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구들장에서 연탄가스가 새어나오고 연탄가스 마시면 김치 국물을 마시게 하던 그런 시대, 전쟁 고아로 자란 한 여자와 모든 걸 잃었던 한 남자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축복해주어도 모자란 사랑이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바라는 것같지 않습니다. 아슬아슬한 연예계에 발을 디뎌 언제 깡패들과 주먹다짐을 하게 될 지 모르는 남자 강기태, 그가 끝까지 정혜와의 순정을 지킬 수 있을까요. 또 하나의 관전포인트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최완규 작가는 '주몽'을 비롯한 다른 시대극에서도 주인공 커플을 맺어주지 않았던 것 같네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