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빛과 그림자

빛과그림자, 화려한 유채영에게 숨겨진 비밀 검은 돈의 로비스트

Shain 2012. 4. 18. 12:56
728x90
반응형
제5공화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바로 비자금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은 수천억원대의 돈을 어디에 숨겼으며 또 어디에 썼느냐는 '국민의 질문'에 80년대 최고 권력자는 '정치자금'으로 썼노라 대답합니다. 대법원은 전대통령 전두환에게 2,20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지만 그의 미납 추징금은 1.673억원입니다. 아직 70%가 넘는 금액을 납부하지 않은 것입니다.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은 그의 별명은 여전히 '29만원'입니다. 최근 4.11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의 아내 이순자는 정치자금을 뇌물죄로 처리했다며 미납 추징금을 낼 수 없다 발언해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빛과 그림자' 어제 방영분에서 신군부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는 차수혁(이필모)은 장철환(전광렬)이 강기태(안재욱)와 조태수(김뢰하)를 삼청교육대에서 빼주고 조명국(이종원)을 대신 보내버리자 국보위 상임위원장 정장군에게 왜 장철환을 권력형 부정축재자 명단에 넣지 않았냐고 묻습니다. 전두환을 모델로 한 정장군은 표면적으론 장철환이 한때 한빛회 후원자이자 선배이기에 보은한 것이지만 사실은 장철환이 정장군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란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그때 정장군이 불러제끼던 노래의 제목을 아십니까. 50-60년대 인기가수 명국환의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실제 전두환의 애창곡이었다고 합니다.

삼청교육대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기태와 태수. 권력의 횡포에 휘둘린다.


당시 신군부가 집권을 위해 광주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같은 인권유린을 저질렀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연출된 장면들은 대부분 자료 화면이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태가 보는 앞에서 한 사람이 죽자 별다른 조치없이 그 사람을 끌고 나가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다'고 복창하게 하는 장면 말입니다.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삼청교육대 소문으로 사회분위기는 더욱 경직되고 그들의 의도대로 시민들은 쉽게 반발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같은 야권 핵심들이 사라지고 공화당 총재 김종필, 4공화국 권력자였던 이후락이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축출됩니다.

유력한 정치인들을 발목잡는데 성공하자 그들은 신당창당 작업에 들어갑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과 신군부 세력이 결합해 창당하다 보니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극중에서 묘사된대로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며 120억원의 중정 예산을 유용합니다. 추가 자금은 극중 유채영(손담비)이 사교클럽에서 들었던 정보대로 각 기업에서 끌어모은 후원금으로 충당합니다. '차떼기' 이전에 '사과상자'로 돈을 퍼주던 시기입니다. 창당자금을 근거로 전두환은 자신이 받은 돈들은 모두 정치자금이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정치인 개개인에게 퍼준 돈과 측근들이 끌어모은 그 자금을 정말 순수한 정치자금이라 할 수 있을까요. '검은 돈'이라 부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뇌물과 권력의 시대 화려한 유채영의 역할은?

많은 팬들이 '빛과 그림자'의 유채영과 이정혜(남상미)를 비교하곤 합니다. 이정혜는 본의 아니게 강기태를 위험에 빠트리는 캐릭터로 '민폐녀'란 별명을 얻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채 기태와 이별하고 차수혁의 연인이 되기까지 합니다. 장철환이 궁정동 연회에 참석한 이정혜에게 눈독을 들일 때도 기태의 어머니가 헤어지라 종용할 때도 바보같다싶을 정도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곤 합니다. 늘 눈물짓는 그녀는 기태에겐 잠시도 잊지 못할 첫사랑이자 모든 것이지만 보는 시청자들에겐 답답한 역할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유채영은 첫등장 때부터 스타였습니다. 뛰어난 춤실력에 빛나는 무대, 아름다운 외모로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는 앵무새이기 보다 가수이길 원했고 시키는대로 조정당하는 인형이기 보다 자신이 권력을 누리길 원했습니다. 궁정동 연회에 나가지도 않은 정혜가 손가락질 받는 동안 탑스타 유채영은 깜쪽같이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인기를 누렸습니다. 권력을 위해 스스로 윤마담(엄수정)을 찾아간 그녀는 그 야심과 행동력을 바탕으로 기태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합니다. 확실히 최성원(이세창)이 설정한 겨울여자와 여름여자의 대립처럼 두 캐릭터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성격도 대응방식도 전혀 다른 두 여자 정혜와 채영.


80년대가 되자 유채영은 궁정동 여자가 아닌 로비스트로서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모이는 사교클럽을 운영하며 로비 대상을 선정하고 친목을 쌓는가 하면 카쇼기의 부탁으로 무기 거래 알선을 담당할 장철환을 소개해주기도 합니다. 전직 중정부장이었던 김재욱(김병기)과도 친밀한 사이로 사교클럽에서 얻은 신당 창당 정보를 그에게 전해줍니다. 김부장은 지금 재일교포 출신 사업가와 함께 슬롯머신(파칭코) 사업을 한국에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에 로비가 필요하고 거액의 뇌물도 제공해야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채영은 그 시대의 굵직굵직한 검은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카쇼기와 장철환을 연결해준다고 했으니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막대한 돈을 건내줄 수도 있습니다. 거래가 성사되도록 인맥과 수단을 총동원하는 '로비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는 자격을 받고 공식적으로 활약하는 로비스트가 있어 무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으로 로비를 한다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로비스트와 브로커의 차이가 불분명하고 로비스트 자체가 불법입니다. 장철환이 청탁을 넣고 돈을 건내주고 무조건 높은 분을 찾는 태도에서 알 수 있듯 '합법적' 로비가 정착되기 쉽지 않은 환경이기도 합니다.

채영이 상대하는 유력인사들은 하나같이 막대한 자금을 다룬다.


더군다나 무기 거래가 성사되기 전후 주어지는 커미션이나 고위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동안 파생되는 각종 이권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인 뇌물과 권력형 이익입니다. 유채영의 캐릭터가 모델이 된 린다김이나 기타 로비스트의 사실 관계를 모방할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중개하는 돈이 정치권에 유입되면 정치자금 내지는 돈세탁이 된 비자금으로 둔갑할 것이 분명합니다. 전두환, 이순자의 친인척이 저지른, 82년 장영자, 이철희의 권력형 비리나 전경환, 청보식품 사건 등 어마어마한 돈이 그쪽으로 넘어갔으니 유채영도 그쪽에 한발을 담그게 될 것입니다.

5공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 중 하나는 전두환이 퇴임 이후 신당을 다시 창당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90년 3당 합당 후 200여명의 정치, 언론인에게 오백억원대의 돈을 지원하며 5공 세력을 규합, 새로운 정당을 만들기 위해 총 880억원의 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밀리에 추진된 창당 계획은 12.12 사건과 5.18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며 좌절되었습니다. 마치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처럼 그의 자본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며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시켰습니다. 무고한 시민을 죽이고 삼청교육대로 끌고간 그가 뻔뻔하게도 두 번의 집권을 꿈꾸었습니다.

권력과 돈의 뒤를 쫓는 그녀가 어쩌면 강기태의 위혐요소가 아닐까.


이정혜 역시 이제는 5공 실세 차수혁의 연인으로 스스로의 노력 만으로 대스타가 되었다고 하긴 힘든 처지입니다. 재일교포 아버지가 엄청난 갑부로 돈이 아쉽지 않은 것같지만 수혁이 조명국에게 압력을 넣었으리란 짐작이 가능합니다. 정혜와 유채영의 차이는 정혜는 권력을 향해 스스로 뛰어들지 않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 화려하게 빛나며 적극적으로 사랑을 호소하는 아름다운 유채영의 불편한 진실. 유채영은 스스로 권력에 뛰어들어 자신이 가해자들의 일원이 되었고 시대의 오점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궁정동 여인의 권력은 다른 말로 성접대이며 로비스트 활동은 뇌물죄일 뿐입니다.

알려진 것에 비해 그 시대 권력자들이 충분한 처벌을 받았는지 의문입니다. 씁쓸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돈과 권력이면 안되는 일이 없는 시대입니다. 멋있게만 보이는 유채영을 그런 시대상 속에서 긍정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녀가 그들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손에 쥔 권력일 지라도 악행에 일조를 한다면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정혜 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 차수혁과 한빛회 출신 장철환의 갈등은 80년대 당시 신당 창당이나 각종 정책 수립을 두고 일부 소장파와 하나회 출신들이 미묘하게 갈등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구세대가 득세하길 원치 않았던 신세력이 유학성의 중앙정보부장 임명을 두고 반발했다고 하지요. 그 사람들 중 삼청교육대 총괄책임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최완규 작가가 역사와 창작을 섞는 능력은 하여튼 알아줘야 합니다.

수혁과 장철환의 갈등 어쩐지 눈에 익다.



* 강명희와 양동철이 만나던 카페에서 흐른 팝은 'Ready To Take a Chance Again'로 배리 매닐로우의 곡, 강명희와 차수혁이 만나던 장면의 곡은 Solder of fortune으로 딥퍼플이 발표한 곡입니다. 두 곡 모두 이미 예전에 한번씩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 룸살롱에서 정장군과 차수혁이 부르던 노래는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1955년 명국환이 발표한 곡입니다. 본문에 적은대로 '애수의 소야곡'과 함께 전두환의 애창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5년 당시 KBS 전속가수였던 명국환이 히트시킨 곡으로 김문흥 작사, 전오승 작곡입니다. 강원도 영월에 가면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가 있습니다. 한때는 금지곡이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도 방송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퇴임 후 백담사에 갔을 당시 이 노래 가사를 '방랑시인 전삿갓'으로 바꿔부르며 자신의 백담사 신세를 풍자하곤 했다고 합니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명국환과 '번지없는 주막'의 백년설.


* 룸살롱에서 정장군과 차수혁이 대화를 나눌 때 들리던 곡은 백년설의 번지없는 주막(1940)입니다. 이재호 작곡의 '번지없는 주막'은 '나그네 설움' 등과 함께 백년설의 히트곡입니다. 공부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유학갔던 백년설(본명 이창민)은 태평양 레코드사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고 가수가 되었습니다. 1940년 발표된 '나그네설움'은 10만장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광복 후 계속 가수활동을 하다 1953년 서라벌레코드사를 창업했고 1960년 가수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합니다. 30년 가수생활을 마친 1963년 은퇴하고 1980년 미국으로 이민 후 작고합니다. 남인수, 고복수 등과 함께 시대를 대표하던 인기가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이던 1941년 '혈서지원' 등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친일가요를 여러 곡 불렀다는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흉상 건립을 두고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 이정자와 홍수봉이 대기하던 대기실과 조태수가 있던 룸에서 흐르던 곡은 'In the Navy'로 Village People(1979)의 곡입니다. 'Y.M.C.A'처럼 신나는 노래를 부르곤 했던 빌리지 피플이 해군 지원율이 떨어지자 젊은이들에게 해군에 지원하라 독려하러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잘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가사 내용이 참 재미있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