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천명

천명, 조작과 술수 속에서 살아남은 모란 문정왕후

Shain 2013. 5. 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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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도 선덕여왕과 모란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지만 중국에도 양귀비를 모란에 비유한 이태백의 시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화중지왕(花中之王)' 즉 모란은 모든 꽃들이 머리를 숙이는 화왕으로 최고 권력을 가진 왕후나 후궁에 비유되는 꽃입니다. '천명'에서는 중종(최일화)을 휘어잡은 문정왕후(박지영)이 화중지왕 모란에 비유되고 있고 그녀가 즐겨 그리는 꽃 역시 모란입니다. 후궁을 비롯한 궁중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화중지왕'이라는 천봉(이재용)의 비유가 꽤 적절했지요.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그 꿀이 발린 나뭇잎을 갉아먹게 하고
그렇게 새겨진 글씨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입니다. 나뭇잎에 씌인 글자가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이었기 때문에 일명 주초위왕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때 억울하게 젊은 선비들이 죽고 위훈삭제 사건으로 잠시 주춤했던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습니다. '여인천하(2001)'에서 묘사된 대로 이 사건의 배후에는 중종의 총애를 받던 희빈이 있었다고 하지요.

마음 속에서 계모 문정왕후에 대한 미련을 송두리째 뽑아내라는 천봉. '화중지왕 망국지화'.

'여인천하(2001)'에서 묘사된 주초위왕 사건. 희빈이 이 사건의 주모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종 시대의 조정과 왕실은 한마디로 조작과 술수의 무대였습니다. 정난정을 중심으로 묘사된 드라마 '여인천하'가 궁중 여인들과 조정 대신들의 정치적 대립을 아주 흥미롭게 묘사했던 드라마였죠. 올곧은 조광조가 한발 물러서라는 갖바치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사약을 받던 모습, 인종과 경원대군을 둘러싼 대윤파와 소윤파의 대립, 권력을 두고 후궁과 공주에 의해 조작된 주초위왕 사건과 작서의 변 등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로 권력을 잡을까 싶은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천명'의 천봉은 조광조의 지지자였으니 당연히 문정왕후와 대립관계입니다. 천봉이 '화중지왕 망국지화'란 글씨가 새겨진 나뭇잎을 만들고 민도생(최필립)의 출입패를 걸어둔 것은 그런 조작으로 조광조를 죽였던 왕실 특히 문정왕후에 대한 경고였을 것입니다. 자순대비가 궁중혼사로 정치적인 판단을 했듯 문정왕후 역시 후궁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죽은 쥐를 매단 김안로의 작서의 변과 주초위왕 사건을 겪으면서도 흔들림없이 권력을 유지한 문정왕후입니다.

천봉의 경고를 역이용해 세자가 역당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슬쩍 흘리는 문정왕후.

그러나 문정왕후는 '꽃중의 꽃이 나라를 망친다'는 나뭇잎의 문구를 역이용해 세자가 역당들과 한패거리인 증거로 삼으려 듭니다. 살인사건의 배후로 자신을 지목하는 천봉의 의도를 역이용한 대담한 문정왕후입니다.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궁중에서 살아남았던 문정왕후의 기민함이 돋보이는 설정이었습니다. 물론 '효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했던 드라마 속 세자 이호의 반응도 만만치 않게 똑똑했죠. 중종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불민한 탓이라며 역당들을 잡아들이겠다 말합니다.

조선 왕조에는 반정으로 쫓겨난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명은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고 다른 한명은 공빈 김씨의 아들 광해군입니다. 그들이 진짜 폭군인지 권력의 희생양인지는 역사의 판단이 필요하지만 광해군은 훨씬 실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연산군과 달랐습니다.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새파랗게 어린 이복동생과 왕위를 겨뤄야했던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 마자 계모의 세력을 경계하고 동생과 친형을 죽였습니다. 반면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면서도 계모인 정현왕후(자순대비)와 진성대군(중종)을 살려두었습니다.

모후임을 이용해 이호를 압박하는 문정왕후. 계모를 의심하던 이호는 거북 구의 정체를 알게 된다.

왕이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자를 두어 권력을 안정시키는 것과 자신의 권력을 찬탈할 수도 있는 왕위계승자를 살려두는 것은 조금 문제가 다릅니다. 핏줄의 관점이 아닌 권력의 관점에서보면 연산군에게 진성대군은 정당한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라이벌이었습니다. 어쩌면 복수를 하기전에 제일 먼저 눌렀어야할 상대가 진성대군이었고 연산군 역시 그 정도 계산은 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연산군은 위협은 하면서도 계모와 이복동생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에게 인목대비는 어머니라기 보다 새파랗게 어린 여성에 불과했으나 연산군에게 정현왕후는 자신을 길러준 친어머니였습니다. 평생 어머니로 알고 지낸 그녀를 쉽게 내칠 수 없었던 것이 연산군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천명'의 세자 이호(임슬옹)가 문정왕후와 대립하면서도 끝끝내 망설이며 조광조의 지지자인 갖바치 천봉에게 비난받으면서도 쉽게 모란꽃을 버리지 못했던 것도 유일한 어머니인 문정왕후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자 이호 역시 연산군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란 뜻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행동 동기가 된다. 이호에게는 없었던 핏줄에 대한 애착.

반면 문정왕후는 궁궐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주초위왕 사건으로 조광조가 죽을 때도 김안로가 자신을 몰아내고자 할 때도 문정왕후는 민첩한 대응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인종은 효라는 틀에 갇혀 계모인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나이많은 남편 중종(최일화)은 이미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문정왕후는 구중궁궐에서 버티고 살아남아 친아들 경원대군(서동현)의 어머니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는 최원(이동욱)이 생각나는 부분이죠.

딸 랑이(김유빈)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도망자의 처지를 견디고 있는 최원. 거북 구의 주인공이었던 덕팔(조달환)이 자식과 아내를 위해 악행을 저질렀던 것처럼 거칠(이원종)이 소백(윤진이)을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문정왕후에게도 자식을 위한 모정이 악행의 동기가 됩니다. 결국에 문정왕후가 살아남고 역사속의 세자 이호(인종)이 그렇게 힘없이 스러져간 것도 문정왕후와 최원에게는 있었던 핏줄에 대한 애착이 없어서는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유일한 핏줄인 동생을 너무 사랑해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꿀로 글씨를 쓰면 벌레가 그대로 갉아먹을 것같지만 실제로 실험해본 결과 글자 모양대로 벌레가 나뭇잎을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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