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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공감가는 90년대 청춘

Shain 2013. 12. 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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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던 곳의 백화점 개장 시간은 10시 30분 쯤이었습니다. 급하게 살 물건이 있어 아침 일찍 기다리다 보면 백화점 엘리베이터 언니들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싸구려 사탕을 나눠주었고 오픈한 뒤에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이제는 코미디 프로에서나 볼 수 있는 '올라갑니다'같은 메시지를 날리며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그네들을 볼 수 있었죠. 보기만 해도 아찔한 하이힐에 반질거리는 두꺼운 화장, 90년대 백화점이 손님들에게 과잉 친절을 베푸는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학교 때 지랄맞게 놀드라니' 김형준이 자신을 흉보고 다닌게 사실임을 알고 오지영은 눈물짓는다.

 

더군다나 '미스코리아'에서 오지영(이연희)이 보여준 모습 그대로 엘리베이터 언니들의 처우는 그닥 좋지 않았습니다. 월급은 박봉인데 박부장(장원영)같은 느끼한 인간들에게 험한 소리 듣기 일수였고 예쁜 외모 때분에 성희롱을 당해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야하는 힘겨운 직장이었죠.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 인건비 절감 조치로 그 직장 마저 짤려야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오지영은 박부장의 괴롭힘에 자신을 탓하며 '미친년, 공부 좀 할걸'이라고 한탄 하죠.

오지영은 자신을 미스코리아로 만들어준다는 김형준(이선균)과 마애리(이미숙)의 제안을 받았지만 기쁘지 않습니다. 한때 좋아했던 남자인 형준이 싸고 헤픈 년이라고, 발랑까졌다고, 머리에 똥만 든 년이라고 말하고 다닌 걸 알기에 네가 제일 예쁘다는 형준의 말을 환영할 수 없습니다. 배운 것없는 예쁜 지영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먹으려는 세상 사람들에게 시달립니다. 좀 웃으라는 박부장의 구박에  '와이키키'를 발음하며 눈물짓는 오지영이 슬퍼보였죠.




 

 

 

 

 

그런데 90년대 경제 위기 속에서 '배운 사람들'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적으로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들도 기업 도산으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마당에 공부 잘하는 여성이라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닙니다. 김형준과 함께 '비비화장품' 연구실장으로 일하는 고화정(송선미)은 명문대 화공과를 나와 좋은 상품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지만 요즘 직장에서 주로 하는 일은 연구실에서 짬뽕먹는 깡패 정선생(이성민)과 실갱이를 벌이는 것입니다.

배운 사람이라고 다를게 있나 깡패에게 빚독촉 당하고 하루종일 실갱이하는게 일.

공부 잘하던 김형준은 사채 무서운 줄 모르고 사업자금을 빌렸 습니다. 제2금융권에 대한 규제도 별로 없던 그 시대 사채업자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서웠습니다. 카드회사는 실적 올린답시고 아무에게나 카드를 발급해줬고 학생들은 급전이 필요해 카드긁었다가 공포스러운 빚독촉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벤처붐과 함께 많은 젊은이들이 꿈에 부풀어 회사를 차렸지만 대기업이나 돈 좀 있는 사람들의 횡포로 문을 닫거나 아이템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제 아무리 배웠어도 돈있고 힘있는 사람에겐 눈뜨고 코를 베입니다.

사채업자들에게 맞을까봐 회사 구석 소비자 상담실에 숨어있는 김형준이나 행패부리는 정선생에게 짬뽕국물을 뒤집어쓴 고화정. 식사비 아껴보려고 실험용 핫플레이트에 토스트와 계란을 굽고 비이커에 커피를 타먹는, 학교 다닐 때는 모범생이었고 누구 보다 촉망받던 김형준과 그의 친구들은 정선생에게 구박받는 굴욕을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정선생은 그 상황에서 '사람차별하는 것도 박사들이네, 머리 좋네 역시들. 잘하는 건 많은데 어쩌다 이러고 돈은 벌까'라며 비아냥대죠.

'나를 이용해서 돈 좀 벌어보겠다?' 미스코리아에 대한 당시의 이중적인 인식.

정선생도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깡패들 실력 싸움에 밀려 어린 놈에게 고개를 숙이는 정선생은 어떻게든 돈 좀 받아내보겠다고 형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마음이 약해 보이는 이 깡패는 먹고 살라고 어둠의 세계에 발을 붙였지만 도무지 못된 짓이 안되는 사람같습니다. 서른 갓넘은 고화정이, 새파랗게 어린 김형준 무리들이 배웠다며 자신을 막대하지만 마흔 넘은 정선생 눈에는 엘리트의식으로 가득찬 헛똑똑이일 뿐 이죠.

김형준과 친구들이 개발한 '비비크림'은 요즘은 누구나 아는 최고 히트 상품입니다. 좋은 물건을 만들었지만 형준의 동창이자 투자회사 직원인 이윤(이기우)은 시덥잖게 생각합니다. 본사로부터 투자해도 좋을 기업이란 분석이 왔을 땐 형준의 기업을 사냥 대상으로 생각하며 미스코리아를 배출하라는 조건을 내겁니다. 오지영이 박부장이라는 중간간부와 어떻게 해보려는 김형준같은 남자들, 마애리처럼 젊고 예쁜 여성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동안 세상물정 모르는 공부벌레 형준은 사냥감이 되버린 것 입니다.

노력하는 그 시대 청춘들이 선택한 '미스코리아' 그들에게 해답을 줄 것인가.

90년대는 묘한 시기였습니다. TV 속의 미스코리아를 부러움의 눈빛으로 쳐다보는가 하면 고화정처럼 좀 배운 사람들은 여성의 성상품화라면서 미스코리아 대회를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에 발표된 자우림의 노래 '미스 코리아'는 사자머리에 억지 웃음을 짓고 푸른 수영복을 입은채 사람들 앞에서 워킹하는 그녀들을 직설적으로 공격 합니다. 날 좀 보라며 화장을 떡칠한 모습이 '우습지만' 미스코리아로 스타가 되는 여성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가사가 당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무튼 흥미롭게도 오지영은 미스코리아를 통해 스스로 퀸이 되려 하고 김형준은 오지영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뤄보려 합니다. 미스코리아가 되어 인생을 바꾸고 성공한 경험이 있는 퀸미용실 원장 마애리는 오지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배워도 못배워도 답이 없었던 그 시대. 한때 고교 퀸카였던 오지영과 한때 고교 우등생이었던 김형준에게 해답은 있는 것일까요. 90년대에 대한 향수도 향수지만 노력해도 힘든 시대라는 점에서 묘하게 공감가는 설정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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