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정도전

정도전, 왜 유독 이성계만 이북 사투리를 쓸까

Shain 2014. 1. 1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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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유교하면 제사가 떠오르고 좋지 않은 악습이 떠오르는 것처럼 성리학하면 당쟁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고려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학자들은 조선 유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후대까지 널리 퍼지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한때는 신학문을 연구하는 고려의 지식인이었고 '신진 사대부'라 불리던 개혁 세력이었는데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던가요. 사실 어떤 학문도 크고 작은 오류는 있고 현실에서 이데올로기 보다 중요한 건 정치라서 우리가 인식하는 부정적인 면들을 성리학 자체의 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북방의 장군 이성계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으나 이북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왜 그렇게 설정했을까?

 

드라마 '정도전'의 초반부는 풋내기 정치인 정도전(조재현)의 피끓는 울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개혁군주로 죽을 수 있었던 공민왕(김명수)은 더러운 오명과 함께 살해당했고 조정 대신들을 휘어잡기 힘든 명덕태후(이덕희)와 철없는 우왕(정윤석)은 노련한 정치인 이인임(박영규)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학문은 학문이고 정치는 정치. 본래 권문세족 출신이라 지지 기반도 튼튼하고 권력이 탄탄했던 이인임을 벼슬도 낮은 신진 사대부 정도전이 상대하기란 처음부터 벅찬 일 이었습니다.

거기다 고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부월을 들고 분노했던 최영(서인석)은 충성심 하나 만큼은 그 누구 보다 강했으나 친명정책으로 명분을 살리는 것보다 친원정책으로 실리를 챙기는게 낫다는 이인임의 손을 들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습니다(최영은 공민왕 시기에 원나라의 침략을 막았지만 우왕 초기에는 이인임에 동조했던 것 같습니다). 북원과 명나라가 갈등하는 것이 고려에게 유리하다는 이인임의 말은 누구라도 솔깃할 만큼 그럴듯했습니다. 최영은 정도전같은 급진적인 신진 사대부와 함께 하기엔 힘든 인물인지도 모르죠.

명나라 밀사로 가기로 한 정도전을 원나라 사신 영접사로 보내는 이인임. 풋내기 정도전과 노련한 이인임의 정쟁.

 

이인임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고려가 친원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조작합니다. 정도전은 명덕태후를 만나 직접 명나라 밀사로 가겠다고 자청했지만 이인임은 정도전을 원나라 사신 영접사로 보내는 다른 계략을 꾸밉니다  이인임은 정도전같은 학자가 상대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로 '삼봉집'에 실린 정도전의 기나긴 가난과 유배가 곧 시작될 것같단 예감이 드네요. 이인임과 정도전의 싸움은 꽤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이인임이 죽고 난 후에 정도전과 맞선 인물은 이인임의 조카사위 하륜(극중 이광기)이었으니까요.




이성계의 이북 사투리는 아웃사이더의 상징
정도전의 생가와 자란 곳은 영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경북 영주 사투리를 들어보신 분들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아랫지방과 구분될 정도로 사투리가 독특합니다. 그러나 삼봉은 영주 사투리를 쓰지 않고 다른 등장 인물들 중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이성계(유동근)과 이지란(선동혁) 뿐 인 거 같더군요. 사극에서 지역 특징을 살리는 경우는 흔치 않죠. 안 그래도 한자와 옛말을 쉽게 못 알아듣는 시청자들에게 사투리까지 섞이면 보통 곤란한게 아닙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성계는 이북 사투리를 쓰더군요.

북방에서 근무하는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며 의형제 이지란과 상의합니다. 이성계와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는 바로 그 예지몽입니다. 원래는 서까래를 세 개 지고 나온다는 게 전부가 아니고 닭이 울고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등 훨씬 더 꿈이 요란했고 무학대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해석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번 무학대사도 박병호 씨던데 이 분이 '용의 눈물(1996)'에서 무학대사를 맡았던 분이지요. 이방원, 안재모처럼 이번에도 같이 출연하시나 봅니다.

의형제 이지란에게 꿈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이지란은 첩을 얻을 꿈이라 농을 한다.

 

어떤 나라든 개국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과 상서롭지 않은 기운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왕에 대한 신격화는 필수적 입니다. 이성계처럼 고려를 전복시킨 인물은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겠죠. 이성계가 꾸었다고 알려진 그 꿈이 과장되고 조작된 것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알 수 없으나 이성계 설화는 양꿈 등 꽤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정도전이 등장한  '용비어천가' 12장은 남다른 왕의 자질을 지녔던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을 하늘이 도왔다는 식의 찬양, 이씨가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이 있었다는 내용 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북 사투리는 이성계의 약점을 잘  보여줍니다. 명덕태후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다루가치였다며 최영을 견제하기 위해 이성계를 부르자는 말에 반대합니다. 북방에서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며 전쟁터를 누비는 고려 장수이지만 고려 왕실이 덥썩 신뢰하기엔 출신이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드라마 속 고려에서 기반 약하고 세력 없기는 정도전이나 이성계나 마찬가지 신세 입니다. 풀피리 불며 고즈넉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이성계는 아직까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정체성없는 인물인 셈입니다.

홀로 풀피리를 불며 한숨 쉬는 이성계는 아직 영웅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는 무엇을 꿈꾸는가?

한때 원나라를 위해 일했으나 고려사람이고 지금도 고려를 위해 죽도록 희생하고 있으나 정작 고려 왕실은 그를 인정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합니까. 결국 이성계의 이북 사투리는 바득바득 이인임에게 저항하는 정도전 만큼 이성계도 고려의 아웃사이더란 증명같은 거 겠죠. 처음에는 왜 이북 사투리를 썼을까 고개를 갸웃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젊을 때부터 이성계가 준비된 왕이라는 묘사는 일방적인 '영웅화'이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을 것 같습니다. 정도전이 아직 미숙하듯 이성계 역시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고려의 패망에서 조선의 건국, 그리고 정도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정도전'의 여정은 머나 멉니다. 공민왕의 죽음이 너무 빠르지 않나 싶어 생각해보니 전체 60부작이라 속도감있게 전개하지 않으면 모든 이야기를 다 묘사하기 힘들 것같더군요. 첫회에서 보여준 것처럼 40대의 정도전이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계기는 유배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 인 듯합니다. 정도전의 동반자이자 정도전이 만든 왕 이성계는 예지몽을 꾸고 왕이 될 야망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 역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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