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힐러'는 밤심부름꾼과 인터넷 신문사 기자의 사랑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별이 뜨던 한밤중에 남모르게 소근소근 이어지던 만남이 이제는 환한 낮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바뀌었을 뿐 그들의 러브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드라마의 제목이자 이 드라마의 곁가지인 '힐러'라는 주제는 여전히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시대'라는 말과 '치유'라는 말에 담긴 여러 현실들. 시사에 조금이라도 신경써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에 얼마나 많은 굵직한 현대사의 현실들이 담겨 있었는지 말이다. 판타지와 은유적인 표현으로 혹은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시청자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간접적 표현을 썼지만 민주화 운동, 군부독재, 정경유착, 언론탄압, 언론조작, 어버이연합, SNS 같은 내용들이 화면을 스쳐갔다. 어쩌면 정확하게 현실을 드러냈다면 드라마가 묘사하고자 하는 내용과 멀어지기 때문에 굳이 두루뭉실하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밤의 힐러에서 낮의 힐러가 된 서정후. 그는 밤심부름꾼에서 아버지의 직업이던 기자 생활을 이어받았다.


아무튼 과거와 이어졌던 그들의 힘든 사랑이야기는 그렇게 해피엔딩이 되었다. 300만원주고 섬데이에 입사한 불쌍한 가상인물 박봉수는 힐러 서정후(지창욱)의 범죄 혐의를 모두 뒤집어썼고 어르신 박정대(최정원)는 모든 범죄 혐의에 대한 죄값을 치르게 되었다. 채영신(박민영)을 버리고 최명희(도지원)를 차지하려던 진실을 외면한 대가로 김문식(박상원)은 반쯤 미쳐버렸다. 스스로를 농부라 부르던 사람들에 의해 '해적방송'을 하던 젊은이들이 죽고 해체되었지만 채영신의 실종과 고립된 서정후의 힐러 생활로 단절되어 있던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화해했고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졌다.


서정후가 채영신과 함께 섬데이뉴스 기자생활을 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힐러'라는 해적방송을 운영하며 창간호를 발행하기도 했고 기자생활을 했다. '힐러'는 시대를 치유하는 언론을 의미한다. 사람들과 동떨어져 어두운 곳을 헤매던 밤의 힐러 서정후가 기자가 되어 남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낮의 힐러 서정후가 되었다는 것은 부모 세대의 뜻을 물려받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두 세대를 연결해준 당사자는 늘 망설이기만 했고 후회하기만했던 그래서 행복한 삶 조차 미안해했던 김문호(유지태)다. 서정후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김문호를 보면 묘하게 씁쓸하다.










김문호가 채영신과 서정후를 찾고 그들에게 부모 세대의 비극을 전해주고 서정후에게 얻어맞고 채영신에게 원망을 듣는 과정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꼭 전해져야할 것이라 해도 옳은 일이라고 해도 과거를 현세대에게 전해준다는 것은 저항이 필요하다. 특히 젊은 세대의 상황과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한채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과거는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을 두고 불거진 몇가지 논란이 그랬다. 이 드라마만 봐도 그렇다. 멋지게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날렵한 안경을 쓰고 해커의 메시지에 부드럽게 미소짓는 배우 지창욱은 이해해도 낡은 트럭을 타고 달리며 '민주야 어딨니'를 외치는 젊은 기영재(최동구)를 이해할 젊은이는 드물 것이다.


그런데 또 젊은 세대라고 해서 옛날 세대의 모습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지 않아 사회적 관습 따위는 아무것도 모르는 서정후는 채영신의 아버지 채치수(박상면)의 지독할 정도로 지나친 부성애를 받아들이고 아버지 서준석(지일주)의 진술을 녹음한 전직 경찰 박동철의 집에 갔을 때도 조민자(김미경)에게 물어 박동철의 방에 소주를 뿌린다. 딸을 아끼는 채치수의 마음도 인정하고 굳이 그동안 잘 몰랐던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려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착한 마음이 나와는 관계없다면서도 아버지 서준석과 채영신의 아버지 오길한(오종혁)의 과거를 받아들이기로 캐보기로 마음먹게 했을 것이다.


사실상 젊은 세대를 버렸던 어른 세대들의 마지막 공항 연극.


이 드라마에는 많은 유형의 어른들이 등장한다. 채영신의 표현을 빌자면 이미 '좀비'가 되어 자기 합리화에 빠진채 자기들의 논리를 반복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좋은 사람들로 보인다. 어르신도 늘 화를 내지 않고 김문호만 해도 적당히 좋은 사람인체 하며 오비서(정규수)에겐 일을 시켜도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는 인물이다. 최명희도 발작을 일으킬까봐 세상밖 무서운 일은 모른체하며 쿠키를 굽다 20년 넘게 살아왔고 조민자는 사회비리를 보고 마음을 닫은채 혼자 해커일을 했고 기영재(오광록)은 세상을 버렸고 윤동원(조한철)은 눈뜬 장님이 되어 경찰 생활을 했다. 사실상 그들은 젊은 세대를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밤심부름꾼 서정후는 유일하게 얼굴도 모르는 조민자의 목소리와 통신을 하고 회사에서 머리감는 섬데이 여기자(최승경)는 SNS의 왕이다. 어른들은 어른대로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들대로 노는 시대에 소통은 어디에 있고 과거와 현재는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아마도 강요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라는 압박에 고통받는 사람만 존재했을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시원시원하게 날아다니는 힐러 서정후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쯤 통쾌했었지. 이어져야할 것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했겠지. 감시도 압박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네트워크를 마구 누비고 다니는 패킷처럼 그 모든 족쇄를 벗어난 모습이었으니까.


부모들의 기자 활동을 이어받은 채영신과 서정후. 소통이 이어지다.


그런데 채영신은 유일하게 현장을 뛰어다니며 협박당하는 여배우의 사정을 보고 스마트폰 보다 양어머니의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옛날 핸드폰을 쓰고 구닥다리 노래를 듣고 아빠와 노는 걸 더 좋아했다. 사람을 좋아했다. 서정후는 그런 채영신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무섭지만 아무것에나 마구 뛰어드는 자신과 다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소통하고 싶고 알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도와야하고 당연히 해야하고 숨지 않는 그 용기를 사랑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에 김문호와 젊은 세대를 버렸던 어른들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불쌍한 가짜 박봉수는 버려졌지만 밤의 힐러 서정후는 이제 낮의 힐러 서정후가 되었고 당당히 아버지의 기자생활을 이어받았으니까. 공항에서의 마지막 연극은 젊은 세대를 버린 윗세대의 배려와 젊은 세대의 용기가 가장 빛을 발했던 장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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