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를 말할 때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이는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 유리하게 기술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드라마 '징비록'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류성룡이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드라마다. 과거 많은 사극이 임진왜란을 영웅 이순신에게 맞춰 왔다면 '징비록'은 류성룡의 사람됨과 당파 싸움, 선조, 국제 정세 등 임진왜란의 속사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래부터 200여년 동안 전쟁을 겪지 못한 조선에게 임진왜란은 그 발발 과정부터 대처과정까지 답답하기 이를 때 없는 비극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들이 영웅도 아닌 흔히 '암군'이라 비난받는 선조와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 다투던 재상들이다 보니 그들의 입장 차이가 얼핏 그럴 수 있겠구나 싶으면서도 갑갑해지곤 한다. 때로는 이런 관점의 차이가 변명으로 들릴 수 밖에.


'징비록'은 조선 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선조의 처세를 보여준다. 그의 비겁한 변명은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그동안 수많은 임진왜란의 사건들이 묘사되었다. 안타까운 신립(김형일)의 탄금대 전투부터 통쾌한 이순신(김석훈)의 한산대첩, 치열하면서도 비극적이었던 김시민(박정우)의 진주대첩까지. 드라마는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의 상황 뿐만 아니라 전쟁 이면의 입장 차이까지 비교하면서 보여준다. 특히 북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명장 신립이 왜 전멸을 각오하면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재해석한 장면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매복이 더 유리한 상황이라도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매복에 동원할 수 없고 북진하는 왜군을 막아 시간을 끌어야한다는 드라마 속 캐릭터의 판단이 비록 죽은자의 변명일지라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선조는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겁먹은 임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조는 탁월한 자질을 가진 군주는 아니나 그래도 평균적인 임금 자질 정도는 갖춘 임금이었으나 갑작스레 터진 전쟁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젊고 용감한 아들 광해군(노영학)에게 자신의 자리를 뺐길까 두려워 늘 세자를 경계하고 명나라에 의존하며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든다. 이것이 드라마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역사에 대한 변명이다. 후궁 귀인 김씨(김혜은)가 자신의 아들 신성군(유승용)을 지키기 위해 임진왜란 와중에도 세자와 선조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김공량(김광영)을 이용하는 것은 왕실에서 살아남고 싶어서다. 선조의 변명은 그들의 개인적인 욕망과 별다르지 않다.











그렇게 높는 자들의 이기적인 변명을 보고 있자니 신립과 함께 치른 탄금대 전투에서 살아남아 광해군의 분조를 뒷받침하고 우희다수가(우키타 히데이데, 김리우)를 잡지 못해 류성룡(김상중)에게 혼줄이 나는 이일(서현철)은 어쩐지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일이란 인물은 드라마에서 다소 멍청하고 코믹하게 묘사되는 인물이다. 우희다수가를 놓치고도 선조 앞에서 백성의 환호를 받을 땐 기가 막히다. 왜군을 봤다고 알려주러온 농민을 거짓을 도모하는 간자라며 참수하고 투항하기 위해 찾아온 순왜들을 피해 달아나고 살기 위해 줄행랑치며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라 변명하는 이일은 혹자의 평가에 의하면 류성룡에게 굉장히 밉보인 사람이라 한다. 패장일 수도 있고 능력이 모자란 사람일 수는 있지만 멍청하거나 비겁한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도 같은 못난 사람이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 만큼은 진심일 수 있는 이일이 불쌍한 순간이 종종 있다.


평양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왜군에게 협력했다는 백성의 변명은 마음아프다. 원통하게 죽어간 가족들의 복수를 부르짖는 백성들의 원망은 구슬프다 못해 쓰라리다. 아버지의 질투에 힘겨워하며 힘겹게 석고대죄하는 광해군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부하들의 죽음을 견뎌내는 이순신의 여린 마음은 안타깝다. 그 힘겨운 세월을 살아남기 위해 견뎌낸 수치가 한두가지였을까. 그네들의 변명은 사뭇 마음을 울리는 무엇이 있다. 그런데 첫회부터 군주의 위엄을 강조하는 선조의 투정어린 변명은 어쩐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평균적인 왕의 능력을 가졌다는 선조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을 자신 만을 위해 쏟아부었단 말인가.


선조와 대조적인 못난 사람 이일. 그는 많은 전투에서 실패하고 좌절하고 류성룡에게 미움받지만 선조와 다른 점이 있다.


임진왜란의 삼대대첩 중 하나라는 진주성 대첩, 행주대첩이 승리로 마무리되고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의 군량미 공급은 차단되었으며 더이상 전쟁을 추진하기 힘겹게 된 일본과 원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은 명나라는 조선 모르게 화의를 도모하게 된 상황. 조선으로서는 역전을 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현명하게 의병을 격려하고 임해군(임홍빈)의 목숨까지 포기해가면서 진취적으로 나섰던 광해군과는 달리 무려 18번의 선위 파동으로 광해군을 괴롭히던 선조가 명나라의 위협에 어떤 체신머리없는 행동으로 또 몇번씩 속을 뒤집어놓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글머리에서도 밝혔듯이 어쩌면 역사의 일면, 이 드라마의 재해석은 우리가 보고싶은 역사 속 인물들의 변명일 수도 있다. 국난을 극복했다고 추앙받는 류성룡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완벽한 사람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가 그토록 싫어했다는 이일 장군 역시 실패한 사람이고 류성룡과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인지는 몰라도 드라마에서 보는 것만큼 못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선조와는 다르게 수차례 전장에 뛰어들어 실제로 왜군들과 맞선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더 잘나서 왕의 자리를 지킨 선조 보다 못나서 변명 한번 제대로 못한 이일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조선의 장군이란 이유로 이여송(정흥채) 무리에게 두들겨 맞을 땐 더욱 그랬다.


역사라는 이름의 슬픈 교훈. 그들의 슬픈 변명이 잘 보여주고 있다.


어쨌거나 어린아이들부터 아낙들까지 다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음모를 꾸민다는 이 불변의 진리를 보면서 결국 우리가 깨달아야하는 것은 광해군이나 이순신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아닐까. 전국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죽어나가는 순간에도 얄밉도록 제 한몸 지킬 궁리나 하는 선조나 추켜세우는 신하같은 자들은 시기를 불문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일처럼 계속된 실패로 비난받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차마 못할 짓을 하고도 지도자란 이름으로 존중받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역사라는 이름의 교훈 '징비록' - 모든 사극이 그러하듯 이 모질고 슬픈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아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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