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동화책에서 읽어본 '신데렐라'의 삽화가 그랬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집안을 청소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늘 재투성이 누더기 옷을 입은 신데렐라가 멀리서 바라보는 왕자의 성은 마차를 타지 않으면 도저히 갈 수 없는, 높고 높은 곳이었다. 요정이 신데렐라를 무도회에 보내기 위해 유리구두와 황금마차와 값비싼 드레스를 마련해준 이유는 그 높고 뾰족한 성에 입장하기 위한 룰같은 것이었다. 물론 왕자를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신데렐라의 얼굴과 새어머니와 의붓자매들을 용서하는 됨됨이는 기본중의 기본이었을테고. 마치 동화가 현실이 되듯 현실세계의 신데렐라 서봄(고아성)은 재력도 권력도 남부럽지 않은 한인상(이준)을 만나 하루 아침에 한성의 작은 사모님, 현대판 프린세스로 등극한다.


신데렐라가 공주가 된 것이 아니라 성의 왕자님이 아르바이트하는 서민으로. 기존 드라마의 공식을 깬 '풍문'의 선택.


그런데 처음에는 좀 '있는 집안'과 좀 '없는 집안'의 딸과 아들이 만나 아이를 덜컥 낳아버려 생긴 갈등과 다소 조금 웃긴 갑을 간의 자존심 문제려니 했는데 날이 갈수록 판이 커진다. 나중에는 신데렐라로 등극한 서봄의 이혼이 왕자가 살고 있던 성을 뒤흔들어 놓는다. 서봄의 작은 아버지 서철식(전석찬)의 소송 문제엔 한성의 유망한 변호사들과 한성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비서 민주영(장소연)까지 연루되어 있고 한인상과 서봄이 부추긴 한성 집안 고용인들의 파업은 한성 비자금의 꼬리를 파헤치는 계기가 되버린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높은 성에는 알고 보니 무수히 많은 뒷구멍이 있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지금까지 흔히 드라마에서 보여준 신데렐라 판타지 공식들을 가볍게 깨트린 것도 특이하지만 흔히 우리들이 예상하던 신데렐라와 왕자 즉 재벌 3세와 서민 출신 여주인공 간의 갈등 구도에도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흔히 말하는 '신데렐라' 즉 서민 출신으로 가난하고 성실하게 학습지로 영어를 배우고 변두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사교육같은 건 꿈도 못꾸는 환경에서 자라난 서봄같은 여자아이와 자연스럽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보모부터 간식까지 모든 것을 최상급으로 제공받으며 자란 한인상같은 남자아이의 생각과 행동방식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기존의 신데렐라 판타지 드라마도 두 남녀의 갈등이 드라마의 주요 에피소드가 되곤 했다.










그러나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 갈등이 불거지는 방식도 그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도 흔한 드라마의 과정들과는 달랐다. 그 어떤 불가능한 상황도 가능하게 하는 만능키인 '가족애'와 '사랑'을 남발하지도 않고 하루 아침에 신분이 달라진 신데렐라가 발톱을 잔뜩 웅크린 새끼 호랑이가 되었다가 잠깐 호랑이 등에 올라탄 신세로 전락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 흔한 신데렐라가 중세의 군주론을 들먹이는가 싶더니 고대로부터 현대사회까지 이어지는 갑을 관계의 잔혹동화로 변신한 것이다. 갑이 을을 지배하는 요령부터 을이 갑을 움직이는 요령까지 신데렐라가 알게 되는 그 세계의 블랙코미디는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했다.


결국 한번 '갑'은 영원한 갑이라는 불변의 진리와 신데렐라가 결혼과 사랑이라는 발판을 딛고 힘겹게 신분상승을 했어도 그 자리를 지키긴 힘들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마치 유명 톱스타와 재벌 2세의 결혼 뒷이야기같은 과정을 거치듯 서봄과 한인상도 이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최연희(유호정)와 한정호의 주변을 발칵 뒤집으며 결혼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혼 수순을 밟는다. 한때는 서봄이 갑들의 세계의 일원이 될 것처럼 여겨지며 그들의 친정식구들까지, 언니 서누리(공승연)까지 아나운서로 데뷰시키며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였지만 그것도 잠시 - 갑들의 세계가 굴러가는 앙큼한 비밀이 '왕자'에게 알려지고 난 후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신데렐라 서봄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갑을 관계와 힘겨운 싸움.


원래 멀리서 보기에 아름답고 화려한 성아래에는 그늘지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성 아래 지하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을 짓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 있고 성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배를 곯는 소작농이 있고 늘 부지런히 성을 쓸고 닦는 하인들과 시종들이 있다. 그 커다란 갑을 시스템 비밀을 성인이라면 대충 어렴풋이 알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가 서철식인 서봄도 민주영이 보디가드였던 한인상도 한정호가 그정도까지 직접적인 가해자일 것이라는 것은 잘 몰랐다. 한정호는 삐뚫어진 갑을시스템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큰 축이었던 것이다. 가벼운 신데렐라 판타지처럼 보였던 드라마는 가혹한 현실이 되버린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기본 줄거리는 어떤 면에선 기존 드라마들과 다르지 않다. 빈부 차이가 나는 두 남녀가 만나 갈등하고 집안끼리 대립하고 불륜놀이하는 상류사회 풍속도가 그려지고 사람들 사람살이가 그려지고 연인들이 사랑하고 화해하는 모습들. 그러나 같은 신데렐라라는 소재로도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자리잡은 사회 문제를 꼬집고 우리가 한번쯤 되볼아봐야할 갑을관계를 풍자하고 그 갑을관계의 위상을 바꿔 놓는다. 같은 소재를 다르게 보여준 것이다. 누구나 돈이 필요하고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어 갑질하며 살길 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월 200만원 받으며 '을'로 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한인상의 선택. 그 반전이 어쩐지 흥미롭다.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쏟아질 수는 있겠지만 소위 '왕자' 신분을 버린 사람들, 신데렐라가 되었다가 탈출한 사람들 가끔 있으니까.


갑의 돈과 권력을 무조건적으로 떠받들기 보다는 우리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 아닐까?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될지도 모르는 민주영네와 한정호와의 싸움. 돈도 벌어본 적 없으면서 한달에 삼천만원씩 썼던 한인상이 이제는 500원을 벌기 위해 처가살이를 하며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을'로 태어난 서봄이 신데렐라가 되어 '갑'들 속에서 인형처럼 살아가는 일이 지옥이었던 것처럼 '갑'으로 태어난 한인상이 돈한푼없이 '을'로 살아가는 일도 또다른 지옥이 될지 모른다. 갑과 을의 싸움에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정의도 없는 것처럼 갑으로 살 것이냐 을로 살 것이냐를 선택하는 서봄과 한인상의 삶에도 영원한 답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고 의지했던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놓친 한정호와 활기찬 서봄 쪽 사람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갑의 힘을 떠받들기 보다는 을로 사는 우리들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가 '갑'을 이기는 진정한 힘은 아닌지. 그것이 마지막회가 다가오는 '풍문으로 들었소'가 보여준 해답이 아닌가 싶다.


아울러 재벌 3세와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서민 여성의 신데렐라 판타지, 로맨스로 가득했던 드라마가 같은 소재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풍문으로 들었소'는 꽤 괜찮은 드라마가 아니었나 싶다. 드라마는 무조건 로맨스, 드라마는 무조건 삼각관계나 출생의 비밀이라며 식상해하지만 같은 소재라도 이런 식으로 포인트를 잡기에 따라서는 아주 유쾌한 사회 풍자 코미디가 탄생할 수 있다는 걸 여태 몰랐을까. 제작자들도 그 가능성은 알고 있었지만 시청들도 사회 풍자 보다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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