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선덕여왕엔 포석정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Shain 2009. 6. 9.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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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의 영향력은 놀랍다. 바쁜 현대인의 가벼운 오락거리이자 잘 몰랐던 사실을 한번쯤 일깨워주는 교양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드라마. 고대 역사를 드라마의 배경으로 삼을 땐 미처 생각치도 못한 사실들이 드라마를 통해 방영된다. 퓨전 사극의 영향으로 창작된 내용이 반을 넘는 사극들이 넘치지만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다시 사료를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최근 화랑세기 속 소재 중 드라마로 만들만한 가장 대표적 인물이 TV에서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미실이란 인물, 계림(鷄林)이라 불리던 신라의. 그 인물이 쓴 일기를 토대로 만들었다는 화랑세기는 원래 화랑의 풍월주들을 기록한 글이다. 판타지 사극이 싫다하면서도 시청하게 되는 까닭은 사이코패스같은 모습으로 딸보다도 어린 공주님을 협박하는 미실일 지언정 반갑기 때문이라는 것...

MBC 선덕여왕의 한장면. 국선 문노가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신라는 신성한 장소와 신성한 의식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드라마 속엔 여사제가 등장해 신라 우물 속 신기를 왕이 접신할 수 있도록 하고 곱게 화장한 화랑과 여러 행사들은 어쩐지 고대의 제사를 많이 닮아 있다. 이 부분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던 신라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아마도 그곳은 나정(蘿井)이라 불리는 신성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보도된 바에 의하면 선덕여왕에도 곧 포석정 세트가 등장할 것이라 한다. 포석정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 것인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등록된 포석정(鮑石亭)엔 아래와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포석정에 대한 지식과 일치한다.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잔을 띄워 마시며 즐겼다는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에 보수되어 원형과는 좀 다른 모양이 되어버렸다 한다.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있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견훤의 침략 시 경애왕이 비빈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놀다 살해당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포석정 :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교과서에도 실린 이 내용은 신라가 고려와 후백제에게 휘둘리며 멸망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경애왕이 놀고 먹기 좋아한 왕이라 묘사한다. 노래하며 술마시다 죽은 왕, 견훤에게 도륙당하는 경애왕은 처참하다 못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 포석정에 얽힌 이야기는 신라에 대한 이미지를 깎아먹는 대표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당시는 음력 11월 경(927년 11월)으로 양력으로 쳐서 거의 12월에 해당한다. 그 추운 날에 술잔을 띄우며 노닥거렸단 점도 신기한데 지역적으로 견훤이 그해 음력 7월부터 신라 곳곳을 점령하며 곧 궁성 안으로 쳐들어 온다는 보고를 받았던 그 때, 아무리 미친 왕일 지언정 술먹고 풍류를 즐길 여유가 있었겠느냐는 것. 국난에 처해 주색 즐기기를 일삼을 성격의 왕이라면 차라리 도망이라도 갈 시간이 아닐까.

경주 나정 :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최근 신라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또다른 사당터가 발굴되었다.


1999년경 이 추측을 뒤집을만한 발굴이 이뤄졌다. 그동안 포석정은 신라 말의 놀이시설 정도로 인식되어 제작 년도 역시 신라말경으로 추론했었다. 그러나 이 발굴로 드러난 신라시대의 기와, 즉 포석(砲石 즉 鮑石을 대신하는 글자)이라는 문자가 적힌 기와는 적어도 7세기 경에 제작된 물건으로 짐작된다. 신라초기부터 포석정이 나정이라는 곳과 함께 발굴된 다른 사당터와 공존했으며 그 신성한 곳에 놀이시설 따위가 들어설 리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역으로 이 발굴은 '포석사(鮑石祠)'에 대한 기록이 실린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증명하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포석정은 포석사에 딸린 부속 시설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은 이미 80년대부터 있었다 한다. 화랑세기엔 포석사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유명한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례가 이루어진 곳도 신라의 안녕을 빌던 곳도 포석사라고 적혀 있다.

출처 : MBC 선덕여왕 - 우물에서 올라온 알로 의식을 치르고 있는 진지왕과 미실궁주. 드라마에선 나정과 알에 신비한 분위기를 가미했다.


나정이 진짜 우물이냐 아니면 다른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나정으로 알려졌던 발굴터가 그냥 일반 제사시설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분명 또다른 발굴이 있고 사료 분석이 있으면 해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현재 발굴되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신라 유물들 중 포석정은 그 해석을 달리해서 알려야하지 않겠는 것.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포석사가 등장할 장면은 얼마 남지 않았을 듯하다. 이미 나정의 존재를 알이 담긴 신물로 해석하여 왕의 의식을 치르는 장면을 몇번 연출한(즉위식, 낭천제 등) 드라마는 신라 건국신화와 관련된 나정(蘿井)을 우물로 해석하긴 했으되 신성한 물건으로 신비롭게 연출했다. 발굴된 사당터가 팔각형 모양이었단 점은 드라마와 달랐다.

출처 : MBC 선덕여왕 -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여왕이다. 어서 빨리 여왕이 되어 첨성대가 어떤 비밀로 지어졌는지 설명하는 장면이 나왔으면 한다.


신궁이 있었다는 점과 신궁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 등도 제대로 등장하고 있으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여러 왕실 여성들과 관련된 물건들도 신궁에 있었다 한다. 아마 그점을 살려 TV에서 구현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또 유교가 사회를 지배하기 이전엔 관직을 받던 여성들이 있었지만 현재 드라마는 그 부분을 많이 축소한 상태다.

선덕여왕은 화려한 복장과 설정으로 신라시대의 신비로움을 꽤 판타지스럽게 그리고 있는 드라마다. 역사에 과장을 더하고 인물 해석을 극단적으로 선택하는, 판타지 사극 자체엔 반감이 있고 또 역사 해석엔 사실성이 기반이 되어야함이 원칙이겠지만 상상력으로 나정과 포석정, 연무장, 궁궐 등이 재현된 모습은 시청자로서 반갑기 그지 없다.

많은 신라 왕실의 관계를 선덕여왕 중심으로 개편해(미실과 왕실의 관계는 몹시 호의적이었다 보는게 맞지 않을까, 선덕여왕 보다는 지소태후와 라이벌이었다 보는게 낫다) 드라마틱한 볼거리에 집중하기 시작한 드라마 선덕여왕. 고려인들이 화려하고 문란하기 짝이 없어 감히 그대로 적을 수 없었다는 신라시대의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묘사될까?

신관이 산실을 꾸려 공주 천명을 낳고 진평왕이 신하들에게 탄생을 알리는 장소에 포석정 비슷한 부분이 보입니다. 신성한 장소에 있는 의미란 뜻입니다.


진평왕이 주렴구를 굴리며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연회를 배푸는 장소에도 포석정이 보입니다. 이 장면에선 유흥을 즐기기 위해 이용됩니다.


결국 드라마에선 사당(신당)으로서의 역할과 연회 장소로서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묘사될 모양이다. 저 물이 흐르는 모양새는 아무리 보아도 포석정이다. 같은 장소가 첫번째는 태어날 왕의 아이를 맞을 산실로 이용되었고 두번째는 주렴구를 굴리며 술마시고 즐기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모든 행위의 신성함을 강조한 설정인지는 몰라도 포석정에 대한 두가지 의견을 모두 참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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