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로열패밀리

로열패밀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열린 결말

Shain 2011. 4. 2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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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원래 구차하게 사소하고 작은 죄를 저지르고 사는 거다, 극중 한지훈(지성)은 살인자로 단죄될 뻔한 과거 때문인지 스타 검사 출신이면서도 법적인 단죄를 전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같은 남자입니다. '좋은 인간'이란 말 보다 '좋은 사람'이 좋다는 그의 말, 김인숙(염정아)에게 앞으로 구차하게 살자는 그의 말은 진솔하면서도 김인숙이 평생 찾아헤매야 했던 정답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원해줘서 고맙다며 웃는 김인숙의 미소는 개운하기까지 합니다.

드라마 '로열패밀리'의 매력을 꼽자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원작을 멋지게 재해석한 점입니다. 일본 원작 '인간의 증명'의 주인공 코교는 자신을 위해 저지른 범죄가 결국은 자신을 변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 친아들과 지인을 살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김인숙이 끊임없이 속죄하고 자신을 괴롭히고 자책하다 파멸을 자초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쿄는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할 자격을 갖춘 사람을 끊임없이 피해다녔지만 인숙은 오히려 지훈 만이 나를 단죄할 수 있다며 어서 '내 목을 치라'고 재촉한 셈입니다.



두번째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극중 상황의 상징성입니다. '거대 공룡'에 의해 짓밟혀도 찍소리 못하고 당하고 살아야하는 여주인공, 그런 그녀를 무시하는게 당연하다고 공개적으로 동의하는 '로열패밀리'와 그 주변 사람들은 어쩐지 모르게 상실된 현대인들의 '인간'됨을 떠올리게 합니다. 재벌의 딸은 돈과 명령으로 사람을 움직이는데 능숙하고 정치인의 딸은 뇌물을 주는 방법에 익숙한데 서민으로 자란 인숙은 그저 '친분'이 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는 소중한 것이지만, 재벌들은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냄새'가 그들에 저항하는 힘이 됩니다.

세번째 매력은 출연진들의 연기력이 소름끼치도록 훌륭했다는 것입니다. 공순호(김영애) 회장의 지독한 카리스마는 극중 인숙의 가련한 처지를 부각시키고 복수에 당위성을 주었습니다. 특히 '저거 치워'란 한마디와 'K'란 호칭으로 냉정한 재벌 회장의 성격을 표현한 건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선명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염정아 역시 울부짖고 눈물흘리거나 소위 '반전 미소'를 짓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섬뜩했고 조니가 어떻게 자상을 입었는지 이야기하며 오열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인숙과 한지훈은 단순히 실종된 것이다

오늘 아침 포털 사이트에 실린 기사 중 하나는 '염정아와 지성의 죽음'으로 로열패밀리가 끝을 맺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방영분을 보신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정확히 두 사람이 죽는 장면이나 암살되는 장면이 등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공순호가 헬기를 이용해 김인숙을 죽이고자 했고 두 사람은 헬기 안에서 멀리 떠나자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입니다. 지훈은 헬기를 타기전 헬기조종법을 배운다고 했었기 때문에 탈출하여 멀리 달아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던 상황입니다.

마치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 중 영원히 실종되었다는 생떽쥐베리처럼 길잃은 조종사처럼 그들이 그냥 없어졌을 가능성도 열어둔 것입니다. 실제 평창과 서울 사이에 헬기가 실종되고도 발견되지 않을만한 장소는 거의 없으니까요. 지훈이 서순애(김혜옥)에게 남긴 편지, 거대 공룡과 싸우기 때문에 나를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절대 믿지 말라며 엄마를 안심시키는 그의 말은 시청자들에게 '다른 결말'에 대한 희망을 줍니다.


더우기 무슨 일이 있어도 김인숙 만은 죽이려 했던 공순호의 아집과는 달리 진정한 로열패밀리는 살인같은 일은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조현진(차예련)의 철학, 차기 JK 회장으로 등극하는 그녀가 암살범 리처드 김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아버지처럼 가깝게 지내는 김변호사(독고영재)가 현진의 뜻을 잘 따라주는 편이니 두 사람이 그냥 도피하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인숙과 한지훈이 살아서 승리를 만끽하며 행복하게 JK를 경영한다는 것은 많은 시청자들의 바람이자 재벌과 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바람직한 마무리이지만 거대 공룡과의 싸움이 승리로 끝난다는 것은 어쩐지 마뜩치 않습니다. 이기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라던가 '이상'같은 것이 그리 손쉽게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괴물을 싸우기 위해 자신 역시 '괴물' 즉 또다른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 모순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무엇 보다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인숙을 살려둘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숙과 지훈이 손쉽게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약자들이 그들과 싸운다는 행위는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희망의 정점에 올랐다 사그라들곤 하지만 저항하고 극복하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을 이기고 살아서 그 '거대 공룡'의 입을 빠져나왔다는 것, 그 자체로도 통쾌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인숙은 끊임없이 도전했고 드디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죽는 게 맞는 결말일까. 아니면 살아서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죽었든, 죽지 않았든 간에 분명한 건 평생을 고통받고 한번도 활짝 웃을 일이 없었던 김마리, 김인숙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는 것이고 지훈과 함께 있으며 행복해했다는 점입니다. 마리를 구해주고 싶어한 한우석의 희생, 그녀의 인생을 가여워한 엄집사(전노민)의 희생, 엄마의 행복을 원했던 조니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2010년 상반기 최고의 드라마

김인숙의 스티브 살인은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리고 조니를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 죄책감 때문에 살인죄를 뒤집어 쓰려 했습니다. 한 평범한 인간인 그녀는 평생을 속죄하며 단죄받으려 애쓰고 있는데 자칭 로열패밀리라는 인간들은 힘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려 하면서도 그를 죄라 생각치 않습니다. 이 흥미로운 대조가 사회와 맞물려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감정을 자극합니다. '인간의 증명'이란 주제가 이리 탄생할 수 있다는게 저는 아직도 놀랍기만 합니다.

'로열패밀리'의 마지막 방송 시청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몇분이 지적하듯 이 생방송 드라마에는 몇가지 오류도 있습니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라 성토하는 분도 있다는데 꾸준히 시청해본 결론으론 권음미 작가와 김영현, 박상연 크리에이터의 능력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추리극, 미스터리극 중에서 방영시간을 이토록 기다려지게 하는 드라마는 분명 드물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드라마에 정치적 의미까지 부여할 수 있었던 작가 김영현은 한번 더 굵직한 수작을 만들어냈습니다.


드라마 초반부를 워낙 박진감있게 풀어갔기 때문에 후반부의 다소 느린 전개가 지적되긴 했지만, 18회로 연장된 것치고는 상당히 촘촘하게 잘 짜여진 드라마입니다. 지난주에 죽음으로 하차한 배우 '전노민'은 '선덕여왕'의 설원과 비슷한 역을 했지만 이번에는 한 여자의 인생을 모두 감싸안을 수 있는 속넓은 남자 역할을 해냄으로서 최고 인기남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미실' 고현정에 이어 카리스마있는 악역으로 등극한 김영애씨의 가치가 다시 한번 증명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무엇 보다 환영할 일은 연기자 '염정아'의 재평가가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동안 연기를 잘한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별다른 대표작이 없던 염정아에게 이번 드라마 '로열패밀리'로 대표작이 하나 생겼습니다. 섬세한 감정표현이나 오열, 극중 캐릭터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표정 등은 염정아를 위한 영화나 드라마를 한번 더 꿈꿔볼 수 있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안내상, 전미선, 서유정, 오미희, 이채영 등도 조연급이지만 '캐릭터'에 부합하는 역할이라 조연이라 볼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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