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풍선/有口無言

'내 친구 깨몽' 만화가, 이보배님 별세

Shain 2011. 5. 26.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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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만화책의 무게가 무서워 전혀 새로운 책을 사거나 잡지를 구해오지 않지만(한동안 책 특유의 종이 먼지와 함께 살 정도로 만화책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애니메이션으로 예전의 재미를 충족해보려 했었는데 '만화'가 주는 재미와 '애니'가 주는 재미는 많은 부분 다릅니다. 요즘은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만화책을 읽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네요. 이런 저런 작업을 하다 보면 만화책 보다는 휴대용 기기에 TV 드라마나 동영상을 틀어놓는게 훨씬 편리하기도 하구요.

종종 이야기를 적는대로 저는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책과 각종 문화적인 오락거리를 자주 즐기고 싶었던 그런 10대 시절을, 원하는 책 한권 사려면 버스타고 1시간 정도 가야하는 그런 곳에서 살았기에 제가 접할 수 있는 건 오지까지 방영이 되는 FM 라디오와 철지난 만화책, 잡지 정도였습니다. 예전 학교 도서관은 아시다시피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라 이미 초등학교 때 다 읽어버린 명작 전집이 전부였지요.


거기다 살던 지역은 TV 전파가 잡히지 않던 지역이라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으면 TV를 볼 수 없었는데 그 케이블도 저희 집 쪽으로는 공사를 해주길 꺼려했습니다. TV, 책같은 대중적인 문화수단와 동떨어진 청소년기. 그 문화적 굶주림은 아마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전혀 모르실 겁니다. 인터넷 중독자가 인터넷이 끊긴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대학교를 가서도 그 이후에도 '책'에 대한 무한한 구매 의욕을 불태운 건(자취해야하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샀죠) 그런 경험 탓입니다.

그런 저에게 라디오에서 들려주던 도시의 학교 문화와 철지난 잡지에서 읽을 수 있었던 '만화'가 보여준 새로운 세상. 특히 만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현란한 상상력은 저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한때는 만화가가 되겠노라 학업을 그만 두고 싶었고 문하생이 되고 싶어 좋아하는 만화가의 집주소를 알아두기도 했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과 글자로 사람의 머리 속과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재주, 세상에서 제일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남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물으면 흔히 알려진 연예인이나 위인의 이름을 대기 보단 만화가의 이름을 대답하길 몇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만화'란 매체, 혹은 만화가들은 저질 정치인이나 저질 경제인 보다 못한 음지의 예술가들이란 평가를 받곤 합니다. 한때 커질대로 커진 한국 만화시장을 토대로 '한국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고 만화와 애니 산업을 키우자는 분위기도 고조되었지만 고작 '만화가'들에 대한 대접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하는 건 어릴 때 너무 기발하다며 재미있게 봤던 구닥다리 만화 '내 친구 깨몽'의 작가 이보배님이 별세하셨기 때문입니다. 만화가 이보배는 만화가 이진주의 아내로도 유명했는데 만화가 이진주는 그래도 '달려라 하니' 등의 유명 애니메이션 작품이 나마 나름 기억하는 팬층이 많은 편이지만 이보배는 상대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은 편입니다. 최고 히트작이랄 수 있는 '내 친구 깨몽'은 저 조차 내용이 가물가물하니까요.

한 초등학생 여자아이에게 '깨몽'이라는 미지의 친구가 생기고 그 친구와 이런저런 우정을 쌓는 내용이었던 것같은데 남들에게 보이기엔 그냥 도깨비나 먼지 인형으로 보이는 그 신기한 존재 때문에 생기는 에피소드입니다. 주인공 여자아이 청이가 참 예쁘장하고 새침하고 까탈스런 아이였던 걸로 기억하고 좋아하던 남자애도 있었던 거 같은데 그 남자애 앞에서 희한한 먼지인형으로 변신하곤 합니다. 나머지는 자잘한 에피소드 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


'깨몽'의 뜻은 '꿈(夢) 깨라'를 한글과 한자어를 섞어 만든 신선한 조합으로 요즘에도 종종 '깨몽'이란 표현을 쓰는 어른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한때 많은 초등학생들을 울고 웃겼던 즐거운 만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동안 존중받지 못하고 잊혀간 만화가 1세대, 2세대 작가들의 가치를 지금에야 인정해주고 싶어도 그 시절의 자료 조차 흔치 않은 요즘이죠. 그 흔한 연예인 인터뷰는 많아도 만화가 이보배의 인터뷰는 잘 검색도 되지 않네요.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기사를 읽어 보니 두 만화가 부부가 필명으로 삼은 '진주'와 '보배'는 두 따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위한 만화를 많이 그렸던 만화가들답게 딸들을 아주 많이 사랑한 것 같아 더욱 안타깝네요. 부부가 나이도 비슷하고 아직 환갑도 지나지 않았던데 너무 빨리 별세하신 게 아닌지 안타깝기만 하군요. TV 중심의 대중문화가 발달하고 책이나 만화도 많이 화려해졌지만 그 시대의 상상력을 뛰어넘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있답니다. '깨몽'을 선사하시고 가신 작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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