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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현 19

계백, 실패한 영웅 계백 결코 헛된 희생은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고칠 수 없는 것이 이미 지나간 역사 속 사실입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이란 것도 고구려와 백제는 역사 속의 기록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점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 보다 공격적이고 의지가 강한 왕이었다는 의자왕이 패망한 나라의 군주라는 점도 변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적힌 이야기가 과장되고 날조된 이야기라 쳐도 이 드라마 '계백'의 주인공들이 기쁨의 주인공들이 아닌 슬픔의 주인공이란 점은 뒤집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찬란한 백제는 무엇 때문에 멸망하였는가. 백제를 지배한 권력자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 보다 모자라고 어리석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시대가 백제를 돕지 않았기 때문인가. 여전히 저는 사료 속에서도 창작된 이..

계백, 충신을 죽인 은고 그녀의 최후는 낙화암인가

오랜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던 백제가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멀지 않은 과거에는 주색에 빠진 의자왕이 실정을 하여 신라와 당나라를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또 백제 말기 귀족들과 왕족들이 타락하여 국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최근에는 의자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 성을 탈취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당시 백제는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을 만큼 탄탄한 나라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단지 백제는 한반도 내 삼국의 역학관계와 고구려를 제압하려 했던 당나라의 정세 때문에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원전에 세워진 백제가 멸망한 것이 660년이니 거의 700년 가까이 융성했던 한 나라가 완전무결했을 리는 없습니다. 신권과 왕권의 대립으로 내정이 소란했던 시기도 있..

계백, 황후가 되려 스파이가 된 은고 여자 때문에 나라가 망하다?

많은 사람들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사자성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란 뜻인데 얼마나 미모가 뛰어나면 한 나라가 망해도 모를 만큼 빠져들 수 있을까. 경국지색은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자성어이기도 합니다. 또 실제로 '한 나라' 정도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여성에게 빠져 한 가정이 붕괴되고 기업이 무너지는 경우도 없잖아 찾아볼 수 있으니 사람들은 '여자 잘못 만나면 팔자가 꼬인다' 내지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쉽게 내뱉기도 합니다. '아내의 유혹'같은 TV 드라마에서도 자신의 복수를 위해 한 집안을 풍비박산내는 여자 이야기가 인기를 끌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실제 '나라를 망하게 한 여자'라는 평을 받는 여자들은 대부분 꽤 오래전 인물들입니..

계백, 타오르는 은고의 분노 사택황후 부활하다

지금은 조각을 잃어버린 고대사의 한부분 백제, 사람들은 남겨진 주변국 기록으로 당시의 백제가 어땠을 지 상상해 보곤 하지만 그들 나라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기에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볼 뿐 이것이 맞다 그르다 확실히 대답하지 못합니다. 백제는 왜 신라를 자주 공격했으며 신라는 왜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와 손을 잡았을까. 의자왕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왕이었다는데 어쩌다가 신라와 당에게 패망하고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았는가. 현대사 만큼이나 치열하게 전개된 당시의 역사가 문득 궁금해지곤 합니다.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은 드라마 '계백' 속의 역사가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실제 역사' 라는 것도 백제를 폄하한 삼국사기나 진위 여부에 말이 많은 일본서기 정도이니 드라마의 내용이 틀렸다 맞았다 ..

계백, 용의 비늘을 건드리면 목숨을 잃는다

아직까지도 정치학, 제왕학의 고전으로 통하는 한비자의 글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실려 전하는 내용입니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사학자로서의 책임을 놓지 않았다는 사마천은 한비자(韓非子)에게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한비자열전'을 썼다고 합니다. 그 중 한편에 실려 있는 내용이 어제 성충(전노민)이 흥수(김유석)에게 말한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는 부분입니다. 한자로는 역린(逆鱗)이라고 합니다. 한비자는 왕에게 건의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용을 다루는 과정에 비유해 설명합니다. 용은 본디 순한 동물이라 길들이면 사람도 올라탈 수 있지만 주의할 것은 목 근처에 길이가 한자나 되는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을 역린이라 하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그 용은 ..

계백, 의자의 비열한 계책으로 은고는 망국의 요부가 되나?

정치라는게 본래 목숨을건 다툼이고 보면 처음부터 필부의 삶을 살지 않고 정치판으로 뛰어들었을 때 비극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했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실권을 잡는데 실패하면 목숨과 재산을 잃을 뿐만 아니라 삼족을 멸하는 처벌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 마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수치스런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극중 은고(송지효)가 원수 사택적덕(김병기)을 아버지라 부르며 복수를 결심한 것은 아버지 목한벽이 그런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 사람들은 멀리 도망가 숨어 살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은고라는 캐릭터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는 여성입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호랑이 굴에 들어갈 수도 있고 자신의 한몸이 부서진다 해도 가족과 연인을 살..

계백, 이순신 조차 피해갈 수 없었던 괘씸죄의 덫

신라 선덕여왕과 백제의 의자, 이모와 조카로 설정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나 했더니 결국 의자(조재현)는 선덕여왕을 만나지 못하고 백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실제 두 사람이 조카와 이모 사이라 쳐도 시기적으로 백제와 신라가 무력 충돌을 자주 하던 때이니 평화로운 접견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제작진으로서도 의자왕에 필적할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을 등장시킨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겠지요. 결국 의자의 신라 방문은 백제의 숙적 김춘추(이동규)를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할 모양입니다. 의자왕은 632년 무왕 재왕 시절 태자가 되었고 그 때의 나이가 30대에서 40대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상당히 늦게 태자 자리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데 선덕여왕은 같은 해에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647년에 선덕여..

계백, 행회의 영묘는 왜 은고를 위해 자결했을까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사극'에는 어쩔 수 없이 현대인들의 정치적 가치관이 개입하게 됩니다. 때로는 진보와 보수의 다툼이 연상되는 대립구도가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역감정이나 재벌과의 갈등이 떠오르는 구도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드라마 '계백'에 등장한 사택황후(오연수)와 사택씨 일가들이 젊은이들인데다 새로운 백제를 꿈꾸는 계백(이서진)과 의자왕자(조재현) 보다 부패한 기득권층처럼 보이는 건 그런 연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구세력과 신세력의 정치적 입장 차이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극중 의자는 무왕(최종환)의 정치적 승리를 도모한 공으로 태자로 책봉되고 아내 연태연(한지우)는 태자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들 부여태는 정식으로 부여의자의 아이로 인정받습니다. 민심을 살펴보겠다며 자신과..

계백, 역모죄에도 교기와 사택황후가 살아난 이유?

현존하는 사료에 기록된 백제사는 매우 짧기 때문에 계백'처럼 30부가 넘는 드라마를 제작하자면 각종 사료와 유물이 다 동원되기 마련입니다. 일단 우리가 흔히 아는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자(조재현)의 어머니로 등장한 선화황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기한 이야기와 종교이야기를 다수 적은 삼국유사대로 설정한 것일 뿐입니다. 또 무왕(최종환)이 최후까지 함께 한 아내가 사택황후(오연수)라는 건 미륵사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나온 기록 때문에 유추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자와 어제 방송에서 쫓겨난 교기 왕자(진태현)의 어머니가 다르다던가 두 사람이 권력 다툼을 했다, 또 은고(송지효)가 의자왕의 왕비였다는 점 등은 무엇을 근거로 설정한 것일까요. 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을 기본으로 창작된 것입니다...

계백, 자중지란으로 사택황후를 잡는 은고와 계백

이야기거리도 많고 사람도 많았던 중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떨쳤던 황제는 누구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진나라 황제 진시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과묵하고 신중했다던 진시황제는 성인이 되어 엄격한 사법권과 무자비한 성정으로 여기저기 악명을 떨쳤으며 말년에는 감히 영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기도 하고 진흙병사들을 세워 놓은 지하나라, 엄청난 규모의 황제릉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진시황제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역사상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 살아있을 때는 형가의 암살도 피할 만큼 조심스레 권력을 지켰던 그의 죽음이 몹시도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에 기생하며 그에게 아부하던 신하들은 다음 권력을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해 황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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