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천명

천명, 인종과 문정왕후가 보여준 유교사상의 폐단

Shain 2013. 6. 27.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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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사회였고 왕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나라였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되느냐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비록 때로는 왕권이 약해져 외척에 시달리고 외세의 압력으로 왕이란 존재가 유명무실해질 때도 있었지만 왕이 어떤 의지를 가지냐에 따라 백성들의 삶도 달라졌습니다. '천명'에서 왕위를 두고 대립하는 세자 이호(임슬옹)와 문정왕후(박지영)의 정쟁은 최원(이동욱)의 딸 랑이(김유빈)의 생존과 직결되고 나아가서는 배고프고 억울해서 도둑이 되어야 하는 거칠(이원종) 패거리들의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오른 인종. 그러나 문정왕후를 살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


드라마 '천명'의 큰 줄거리는 친구 민도생(최필립)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최원이 문정왕후 때문에 위기에 처한 인종을 돕는 내용입니다만 전체적인 대립구조는 권신들과 민중의 대립입니다. 권신들을 대표하는 문정왕후는 사이코패스 김치용(전국환)과 어리석은 동생 윤원형(김정균)을 내세워 권력을 쥐락펴락합니다. 왕자이지만 상대적으로 민중의 편인 세자 이호는 심곡지사 천봉(이재용)과 최원, 거칠들과 뜻을 같이 합니다. 거칠과 최원은 인종이 왕위에 오르기만하면 김치용도 문정왕후도 모두 죄값을 치르리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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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이 날 때 마다 온실에서 소일하며 농사와 학문을 연구하고 기우제를 지내기 전 천문을 살펴볼 정도로 과학적이며 최원을 비롯한 가난한 백성들을 가엽게 여기는 타고난 왕 인종은 오히려 당시 조선이 추구하던 유교적 가치관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인종은 외삼촌 윤임(김익태)을 비롯한 대윤파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 떠는 동생 경원대군(서동현)을 위해 문정왕후를 살려주려 마음먹습니다. 이전에는 어머니가 무서워도 도리는 지키려던 경원대군이지만 지금은 어머니와 형 사이에서 하얗게 질려 있습니다.

인종은 문정왕후가 자신을 여러 차례 죽이려했다는 걸 알지만 자신이 아기일 때부터 친어머니처럼 키워준 문정왕후를 사사하면 '패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문정왕후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 잘못없는 어린 동생 경원대군을 죽여야한단 뜻도 됩니다. 부모를 죽인 원수와 한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인종은 동생 경원대군에게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경원대군을 자식처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인종에겐 가족을 배신하는 고통입니다.

문정왕후를 죽이면 패륜이 되고 경원대군과도 원수가 되버리는 인종.


또한 '패륜'은 조선 사회에서 정치적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 왕실에는 '패륜'이란 죄목 때문에 쫓겨난 왕이 두 사람이나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물론 실질적인 이유야 반대파들 때문이지만 '패륜'은 반정을 도모할 좋은 도덕적 빌미가 되었습니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거나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은 현대인들의 관점일 뿐 아버지와 자식의 도리를 임금과 신하의 도리로 여기는 조선에선 약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극중 홍다인(송지효)이 최원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것도 홍다인의 아버지 장홍달(이희도)이 도문(성웅)을 시켜 최원의 아버지 최형구(고인범)을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홍다인의 아버지 장홍달은 유교적 관념에서 최원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이고 홍다인이 이별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유교적 딜레마 앞에서 인종은 결국 경원대군을 살리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 천봉의 말대로 타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 문정왕후의 거대한 세력은 언제 인종을 위협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충'과 '효'를 강조하는 조선 사회에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과 함께 할 수 없는 최원.


인종은 문정왕후가 조선에 해악을 끼치는 절대악이라는 것을 압니다. 최원의 경고 때문이 아니라도 문정왕후 무리를 살려두면 랑이를 비롯한 백성들의 비극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핏줄의 도리와 뼈속깊이 박혀 있는 유교 사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종의 선택은 최원의 설득으로 인종의 즉위 만을 기다려온 화적패 거칠, 임꺽정(권현상), 소백(윤진이)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홍역귀 이종환(송종호)에게 끌려 유배지로 떠나던 김치용은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잘못된 자가 처벌받지 못하는 제도 속에서 올곧은 수사의지를 가진 의금부 도사가 힘을 쓸 리 없습니다. 홍역귀는 짐독이 묻은 칼을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최원이 암살자에 대비해 서각을 가지고 왔느냐에 홍역귀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비록 가상의 상황이지만 부모인 문정왕후가 자식인 인종을 죽이려했던 엄청난 상황에서도 자식은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하는 윤리와 부모와 다름없는 왕이 백성을 보살피지 않는 억울한 나라에서 백성은 왕에게 충성해야하는 역설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치용은 죽었어도 홍역귀는 짐독을 바른 칼을 맞았다. 문정왕후의 생존으로 다시 시작된 비극.


저는 오늘 밤 마지막회를 맞는 드라마 '천명'에서 최원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인 랑이를 살리기 위해 도망자가 된 최원. 최원의 '천명(天命)'이 하늘이 내린 운명인지 하늘의 명령인지 아니면 하늘이 내린 목숨줄인지는 마지막회가 되어야알 수 있겠지만 문정왕후를 살리기로 한 인종의 선택은 어떤 형태로든 비극을 부를 것입니다. 물론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요. 최원의 설득으로 인종을 믿어보려했던 천봉, 거칠과 임꺽정이 忠이라는 유교 윤리를 버리고, 명종 시기에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의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결국 '천명'이라면 천명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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