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미생

미생, 부러진 하이힐에 숨겨진 안영이의 비밀

Shain 2014. 11. 2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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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에 정장을 처음 입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하이힐이었습니다. 정장을 입어야할 만큼 어려운 자리도 긴장됐지만 갑작스레 7센티 이상 높아진 세상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오래 신으면 발가락이 아파 저녁 무렵엔 하루의 피곤이 두 배가 되곤 하더군요. '미생'의 배경인 종합상사나 대기업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하이힐을 신습니다. 장백기(강하늘)의 혼잣말처럼 왜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을까요. 인터넷에서 비교사진을 제시하는 것처럼 하이힐을 신어야 다리가 더 예뻐보이는 까닭도 있을 것이고 무엇 보다 남자 정장에 운동화 보다 구두가 더 어울리듯 여성정장에도 단화 보다는 하이힐이 더 어울립니다. 요즘은 편한 복장을 내세우는 직장도 많지만 여전히 하이힐은 여성 직장인의 기본 스타일 중 하나입니다.

 

신팀장의 마지막 인사에 먹먹한 표정이 된 안영이. 베일에 싸였던 그녀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저는 다른 여성들 보다 더 높은 굽의 신발을 선호한 편입니다. 남들 보다 키가 작기 때문에 대화하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려면 신발 굽이라도 조금 높혀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시무시한 높이를 자랑하는 킬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키를 높여주는 구두가 필수였습니다. 덕분에 하루 종일 걸어야할 일이 있을 때는 굉장히 힘들어했던 기억이 나네요. 높은 구두로 인해 생긴 피로는 아무리 주물러도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여자들에게 하이힐은 아름다움을 위한 도구이자 사회생활의 필수품입니다. 하이힐의 높이가 단순히 자존심의 높이는 아니라는 이야기죠.

 

'미생'의 완벽한 신입사원 안영이(강소라)는 첫등장 때부터 비밀이 많은 캐릭터였습니다. 신입사원답지 않게 모든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가 하면 남자 직원도 감당하지 못할 힘든 일을 척척 해냅니다. 장그래(임시완)에게 자원팀 캐비넷 비밀번호를 알려줄 정도로 공정한 면도 있고 또 그 일을 자신이 했다고 자원팀 상사들에게 자백하는, 당당한 성격이기도 합니다. 사적으로는 '철벽녀'라 빈틈을 쉽게 보이지 않는 여성입니다. 마초 남직원들 말처럼 여자라고 징징대는 스타일은 아닌데 오히려 그렇게 잘 받아들이는게 더 미움받는 원인일 때도 있죠.

 

 

누군가 장그래의 회사 생활도 보면 담배피우고 싶은 기분이라고 하더군요. 딱히 내세울 스펙도 없고 직장생활도 못해본 장그래는 누구나 걷어차는 축구공처럼 무시당하곤 합니다. 그런데 모든 걸 다 갖춘 안영이가 장그래처럼 담배심부름이나 하고 책상치우는 일을 하는 이유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장백기가 쓰레기통을 매번 씻어주고 오차장(이성민)이 하대리(전석호)의 발을 걸어 수십번 넘어트려도 안영이의 답답함은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장그래와 가장 닮은 캐릭터가 안영이죠. 안영이는 어떤 자세로 자원팀 생활을 버티고 있을까? 비밀스런 그녀의 과거 만큼이나 궁금한 부분입니다.

 

'미생'이 12회까지 방송될 동안 안영이의 비밀을 암시하는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죠. 첫회에서 꾸준히 걸려오는 의문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영업3팀이 접대를 위한 대책회의를 할 때 '접대 고수'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회사 로비에서 삼정물산 신팀장(이승준)이 안영이의 이름을 부른 적도 있습니다. 안영이는 깜짝 놀라서 도망갑니다. 오차장과 나눈 옥상에서의 대화로 안영이는 한때 삼정물산에서 근무했을 것이란 것도 추측가능했죠. 마침내 안영이를 원인터와 삼정물산과의 회의에 다시 만난 신팀장은 안영이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직장 후배를 보는 눈인지 여자를 보는 눈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이었죠.

 

신팀장과 안영이는 회의 자리에서 만나 당황한다.

 

하대리 대신 회의에 참석해 신팀장을 상대로 원인터의 입장을 딱 부러지게 정리하는 안영이를 보며 신팀장은 한편으론 기특해하고 한편으론 씁쓸해하는 듯 보였습니다. 잠깐 등장한 회상장면에서 신팀장과 안영이는 호흡이 잘 맞는 한팀이었고 신팀장은 여성 직장인으로서의 팁까지 알려주는 좋은 선배였습니다. '누가 사수였는지 모르겠지만 잘 가르쳤다'는 말은 신팀장 자신이 안영이라는 후배를 잘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뭍어나는 대사였죠. 그러나 먹먹한 눈빛으로 '팀장님을 뵙는게 아직은 편치가 않다'는 안영이의 말로 봐서는 사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보입니다.

 

안영이의 비밀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입출금기로 통장정리를 하던 안영이는 '이제 끝났다'며 기뻐합니다. 학자금 대출 상환부터 각종 생활비까지 촘촘히 찍힌 통장 내역엔 마지막으로 대출상환이자 150만원이 떡 하니 찍혀 있습니다. 학자금 상환이야 그 또래에게 흔한 일이지만 360여만원의 월급에서 꾸준히 150만원씩 갚았던 빚은 어떻게 된 사정일까요. 꼼꼼한 안영이에게 완벽하지 못한 한가지는 가족이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안영이같이 야무진 성격이 큰 빚을 졌다면 대개는 가족의 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버스에서 '그만 좀 하세요 아버지'라며 전화를 끊었던 적도 있죠.

 

안영이의 부러진 하이힐과 대출금 상환.

 

학자금 대출로 명문대를 다니며 가족의 빚을 갚고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퇴사한 안영이. 울먹이다가 장백기를 만나 말없이 술을 마시는 안영이는 삼정물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주저 앉아 부러진 하이힐을 바닥에 툭툭 치는 안영이에게는 어쩐지 여유없는 삶의 냄새가 납니다. 물론 하대리에게 쌍욕까지 들어가며 능력을 인정받는 지금의 직장생활도 충분히 힘들지만 씩씩하게 하대리를 감당하는 안영이에게는 그보다 더 고단한 과거가 엿보입니다. 그렇게 사람 좋고 조건 좋은 삼정물산을 그만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시 신팀장이 잠시나마 안영이의 남자였던 것은 아닐까요?

 

안영이는 여성직장인들이 겪어야하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중동사업 비리로 퇴출된 박과장(김희원)은 휴게실에서 여직원들에게 커피를 타달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이힐 신고 커피타는 여직원의 뒷모습을 보며 '잘 빠졌다'며 조롱하던 박과장은 안영이에게도 '쟤는 시집을 가면 제 2의 선차장(신은정)처럼 되거나 시집을 못 가면 김선주(황석정) 부장처럼 될 것'이라며 비웃었습니다. 안영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정에 치이는 슈퍼우먼이나 노처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비아냥입니다. 현실적으로 그 말은 틀렸다고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버틸만한 직장.

 

어떤 여사원은 바쁜 아침 시간 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면 지각한 것도 아닌데 질책받아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가끔 급한 마음에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도 있지만 출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화장하지 말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죠. 하이힐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남들 보다 좀 더 고단한 사회생활의 상징입니다. 어떨 때는 그렇게 노력해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마부장이 선차장에게 '남편에게 고마워하라'며 막말을 해대는 이유는 단 하나 선차장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오차장의 입사동기인 선차장이 그 자리까지 오르기 위해 얼마나 힘겨웠을지 짐작가능한 장면이죠.

 

물론 안영이가 여자라고 들들 볶아대는 하대리의 심리를 이해하자면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여직원이 임신하면 모든 부담을 떠맡아야하는 남직원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기도 하고 울까봐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데다 행여 천과장(박해준)과 김대리(김대명)처럼 같이 지방 출장이라도 가면 곤란한 면도 있습니다. 남자처럼 대할 수도 없고 여자라고 대접해줄 수도 없는 불편한 입장은 분명 납득이 가지만 그것이 부당한 대우의 이유가 된다는 건 문제가 있죠. 그러나 냉정한 듯하면서도 안영이와 입사동기들의 처지를 다 살피는 장백기처럼 하대리와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해가 쌓인다면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게 유일한 희망일 것입니다.

 

안영이가 장그래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이유는 동질감?

 

안영이가 삼정물산을 나와야했던 비밀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유난히 강조되는 여직원 안영이의 입장과 신팀장에게 소리지르던 안영이의 반응으로 보아 뭔가 여자로서 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죠. 오차장은 뭔가 알고 있는 것도 같은데 벌써 '미생'도 반 이상 방송됐으니 다음 주에는 속시원히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이힐을 신을 때 마다 느꼈던 통증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 안영이. 그래도 구두를 사주고 싶어하는 장백기나 장그래, 하대리를 넘어트리는 오차장처럼 그녀를 묵묵히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직장생활이 해볼만 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안영이가 잘 해주는 장백기 보다 장그래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은 남자로 보는 감정도 있지만 같은 처지같다는 동질감도 한몫한다고 봅니다. 볼 때 마다 먹먹한, 수많은 미생의 캐릭터 중에서 유난히 안영이에게 따뜻한 눈길이 가는 것은 아마도 그런 느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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