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미생

미생, 아무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단한 안영이의 삶

Shain 2014. 12.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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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전 세대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냐 결혼 못한 여성들을 종종 볼 수 있었죠. 제가 살던 고향에도 그런 가족이 많았습니다. 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못가고 무작정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논을 사고 밭을 사고 그것도 모자라 생활비에 동생학비까지 대주며 힘들게 살던 동네 언니들이 결혼하고도 친정의 돈요구를 끊지 못해 친정을 오가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습니다. 그 언니는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 또래 중에서는 중학교 마치자 마자 공장에 취직하고 월급을 아버지 통장에 입금하는 딸들도 많았죠. 대졸 여성들 중에도 이렇게 가족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기업에 취직해도 그녀들의 고단한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안영이의 발목을 잡은 가족이라는 굴레. 악착같이 회사에 적응한 그녀의 속사정이 드러나다.

 

'미생'의 안영이(강소라)를 보면 예전에 만난 직장 선배가 떠오릅니다. 늘 깔끔한 옷차림에 꼼꼼한 업무처리로 능력을 인정받곤 했지만 그 선배는 잠깐이라도 가족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법이 없었습니다. 적당히 어울리지 않아 사람이 너무 틈이 없다는 평까지 들었지만 그렇게 불친절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상하시는대로 안영이처럼 그 선배도 가족들의 돈줄이었던거죠. 다행히 안영이처럼 사업병에 걸린 아버지는 아니었고 딸의 직장상사에게 돈을 빌려갈 정도로 몰염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연락이 안되면 사무실로 전화해대는 가족들 때문에 그 선배의 속사정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안영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는 시청자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이전 세대의 부모들은 학비나 생활비같은 생계에 꼭 필요한 돈을 요구했지만 안영이의 아버지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사업병으로 자식을 골병들게 합니다. 뻔뻔하게 '아들없는 거 서운한 적 많았지만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한마디라도 했냐'는 안영이의 아버지는 가족이라기 보다는 거머리같단 생각 마저 들었죠. 험한 직장생활하는 딸을 감싸주지는 못할 망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하는데 안영이의 인생이 계속 부모에게 휘둘리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것같아 안쓰럽기만 했습니다.

 

어디에도 털어놓기 힘든 아버지의 돈문제.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어디에도 이런 고단한 삶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할 가족이 오히려 미래를 발목잡는다는 수치는 친구에게도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안영이를 매일매일 괴롭히는 마부장(손종학)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안영이의 자존심을 상처입힙니다. 홀로 모든 것을 해내며 아버지의 빚을 갚아온 안영이에게 회사는 유일하게 미래를 기대해볼 수 있는 공간이자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안영이는 동료들에게 가족의 치부가 드러나서 약점이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겠죠.

 

회사 동료는 친구와는 달리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 힘든 사이입니다. 장그래(임시완)가 고졸이라는 이유로 종종 장백기(강하늘)에게 비꼬는 말을 듣듯 안영이의 가족사가 알려지면 자원팀에서 나올 말은 뻔합니다. 함께 일을 하면서도 적당히 경계하고 적당히 거리를 둬야하는 사람들 - 좀 도와달라는 아버지와의 통화는 안영이가 좋은 직장이었던 삼정물산을 그만두고 신팀장(이승준)에게 부끄러워 했던 이유, 그리고 마부장과 자원팀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괴롭힘을 묵묵히 참아온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하는 그 고단함 말입니다. 가족이 안영이의 든든한 힘이 되어줬다면 안영이도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장백기가 깨달은 절박한 장그래의 절박한 현실

 

위에서 언급한 그 선배는 결혼과 동시에 친정의 시달림에선 벗어났다고 합니다. 결혼 자금 때문에 가족의 요구를 한번 들어줄 수 없는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네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는 말에 눈이 뒤집힐 거 같더라는군요. 보통 그렇게 한번 가족에게 시달리던 여성은 결혼하면 또 시댁의 돈요구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혼 후에는 시댁의 생활비를 대고 가끔씩 자신 몰래 사위에게 돈빌려가는 친정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라마 속 안영이가 누구 못지 않은 업무 능력을 갖추고  남몰래 장그래에게 자원팀 캐비넷 비밀번호를 알려준 일은 정말 대단한거죠. 내게 지워진 짐 많으로도 충분히 버겁고 여유가 없는 남의 일을 돕기는 쉽지않으니까요.

 

뭐 어쨌든 각자 어깨에 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다르고 장백기와 장그래도 만만치 않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한국기원 연구생 신분에서 고졸 학력 대기업 상사맨이 된 장그래는 한순간 한순간이 절박하다고 말합니다. 평소 장그래가 아무 대가도 없이 뚝 떨어진 낙하산이라며 경멸했던 장백기는 10만원 세일즈에서 장그래의 고단한 삶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돌고 유학연수를 다녀오고 스펙을 쌓기 위해 바빴던 과거를 기억하기에 뭐든 쉽게 해내는 듯한 장그래가 미웠지만 10만원 세일즈를 하는 동안 장그래와 자신은 '절박함'의 질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10만원 세일즈를 하며 엿본 장그래의 절박함. 장백기는 장그래의 절박함과 자신의 절박함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남녀 간의 마음을 떠나 안영이가 장그래에게 친절한 이유도 강대리(오민석)를 비롯한 상사들이 장그래를 칭찬하는 이유도 간단합니다. 어차피 금방 떠날 사람이고 고졸 계약직이 남들 보다 성과를 내려면 얼마나 절박했을지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전 '뉴스타파'에서 가난한 대학청년들이 보수화되는 이유를 설명해준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에 맞춰 설명하자면 기존의 사회시스템이 다소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시스템에 순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투자한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 기존 시스템에 동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졸 계약직을 차별하는게 얼마나 치사한 일인지 장백기 스스로도 알지만 고단했던 자신의 노력과 동등하게 인정하기는 힘들다는 거죠.

 

어떤 분이 댓글로도 적었지만 드라마니까 오차장(이성민)같은 사람이 있고 드라마니까 고졸 계약직이 인정을 받지만 실제 사회에서 그들이 대기업 상사맨이 되고 '우리'로 인정받고 같이 일하는 것은 거의 판타지입니다. 다만 우리들은 드라마 속 누군가의 고단한 감정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 뿐이죠. 안영이를 보며 눈물짓는 여성직장인들처럼요. 드라마 속이니까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를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사실 서로의 사정을 모른 척하고 서로의 고단함을 못본 척하는 에티켓입니다. 가끔씩 술한잔 하고 가끔 어깨를 두드려주는게 최선의 격려죠. 한편씩 드러나는 '미생' 속 사람들의 속사정은 아마도 동료들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한번쯤은 털어놓고 싶었던 우리 시대 직장인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 그나저나 지난번에 장백기 맥주 마실 때도 거품이 퐁퐁 나는게 진짜 맥주같더니 이번에도 사우나 앞에서 팬티나 양말을 파는 배우 임시완과 강하늘의 얼굴이 발그레하더군요. 혹시 진짜로 소주 들이붓고 찍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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