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드라마에서 재벌이 사라질 수 있을까?

Shain 2015. 1. 3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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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첫방송된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의 주인공 구서진(현빈)은 다중인격 증세를 가진 재벌2세다. 이 돈많은 남자는 자신이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놀이공원 고객들의 풍선을 모두 금지시키고 어린아이들을 울리며 놀이공원을 탈출한 고릴라를 피해 살려달라는 여자를 밀치고 도망친다. 놀이공원과 오랫동안 계약을 맺어온 서커스단과 하루아침에 계약해지하는 갑질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기도 한다. 시청자들은 구서진이라는 캐릭터가 다중인격 증세를 가진 재벌남이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음에도 입을 모아 구서진이 '재수없다'고 평가했다. 한때 같은 배우가 연기했던 '시크릿가든'의 재벌3세 김주원이 까칠하지만 매력적이라며 호평받았던 것과는 달리 진부하다는 말도 많았다. 드라마 자체가 전반적으로 어수선하고 경쟁작 '킬미 힐미'와 다중인격 소재가 비교되기 때문에 더욱 평가가 좋지 않았겠지만 재벌 캐릭터에 대한 거부 반응 만은 사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매력적인 현빈의 연기에도 혹평받았던 '하이드 지킬, 나'의 재벌 캐릭터. 재벌 캐릭터에 대한 거부반응 심상찮다.

 

드라마는 가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황당한 판타지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지만 드라마의 '판타지' 개념은 사람들의 초현실적인 로망을 좁게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때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드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옛날 동화에도 마녀의 마법이나 하늘이 부리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인간들을 움직였듯이 현대인들에게도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힘을 가진 캐릭터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재벌이었다. 돈이야 말로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최고의 힘을 가진, 현실적인 권력이고 어떤 일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니 말이다.

 

옛날 이야기나 동화 속의 왕자나 공주는 왕족이나 권력을 비꼬는 인물일 때도 있지만 종종 인생의 교훈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타고나게 귀한 존재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나쁜 운명에 휘말려 악당을 물리치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 영웅의 등장으로 도움을 받는 등 권선징악적인 주제와 용기를 주는 내용으로 대중들을 웃기고 울리기도 했다. 어떨 때는 말이 왕자나 공주지 그들이 겪는 고난이나 고통은 평범한 사람들도 감정이입할 수 있는 집안의 몰락, 계모의 구박, 부모의 죽음같은 내용일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일곱 개의 다중인격을 연기하는 배우 지성이 화제가 되고 있는 '킬미 힐미'도 재벌이 주인공이다. 승진그룹의 재산상속 싸움이 주인공 차도현(지성)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있고 다중인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지성의 연기력이 워낙 탁월해서 그렇지 '킬미 힐미'를 두고서도 몇몇 사람들은 또 재벌이 주인공이냐고 불만을 드러낸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극적이고 정신과 의사 오리진(황정음)의 비유처럼 '야수'면 '미녀'의 도움을 받아야하고 '괴물'이 '왕자'로 변하는 판타지는 옛날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요즘은 '재벌 2세' 캐릭터가 동화 속의 왕자처럼 호감받는 캐릭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재벌들은 원래 왕자나 공주들처럼 비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갑질의 대명사가 된 재벌3세도 있고 폭행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재벌2세, 각종 상속이나 경제사건을 일으킨 재벌들로 대중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재벌의 횡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버렸다. 너무나 무개념하고 안하무인인 그들의 태도에 시청자들은 더이상 드라마 속 캐릭터에 이건 판타지라며 감정이입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그런 상황에서 고객에게 풍선을 뺐으라는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이 얼마나 못마땅하게 느껴졌을까. 드라마는 재벌 이야기에 빗댄 사람들 이야기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생생한 현실이 깨트려 버린 것이다.

 

솔직히 제작자 입장에서는 '재벌2세' 만큼 편리한 캐릭터도 없을 것이다. 요즘의 드라마는 화려한 볼거리와 이야기거리를 동시에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값비싼 PPL로 캐릭터를 도배하면 제작비와 화제성 면에서 이익을 볼 수 있다. 거기다 재벌2세를 둘러싼 다소 비정상적인(?) 환경은 드라마의 판타지에 묘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 피를 나눈 가족들에게 기를 쓰고 다중인격을 숨겨야하는 이유는 재산상속싸움을 둘러싸고 가족이 곧 적이기 때문이고 재벌가장이 괴팍하고 돈만 아는 지독한 성격인 것은 돈을 모으기 위해 오랫동안 못할 짓을 많이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은 주인공들의 로맨스에 아주 적절한(?) 장애물이 된다. 소위 다이나믹한 막장이 탄생하기 딱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드라마에서 재벌을 보기 지겹다'는 시청자의견은 매우 납득이 간다. 역사 속 공주나 왕자들은 행동은 개망나니라도 상징적 의미가 있었지만 현대 사회의 재벌들은 뭔가 존경할만한 행동을 보여야 존중받을 수 있다. 더이상 신분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도넘은 갑질을 어쩌지 못하고 돈의 힘에 굴복하는 것도 힘든 나날인데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인 재벌들의 속사정 - 어린 시절의 상처와 트라우마, 사랑을 포기해야하는 비극적인 삼각관계와 정신적인 고통 뭐 이런 거? - 까지 봐야하나 싶을 것이다. ctrl+V처럼 하나의 패턴이 되버린 드라마의 재벌 캐릭터를 한번쯤 되돌아볼 때가 되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현실속 재벌에 대한 반감이 드라마 속 재벌에 대한 반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정형화된 패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흔히 인터넷에서 한국 막장 드라마의 4대요소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 신데렐라 컴플렉스, 재벌같은 것인데(혹은 살인이나 불륜, 감정과잉같은 것들이 들어가기도 한다) 사람사는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 때 재벌이라는 설정은 복잡한 인간의 속성을 표현하기 딱 좋은 포인트일지도 모른다. '킬미 힐미'는 이미 갈등하는 내면의 문제로 고통받는 한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과거의 인기 드라마 중에는 '재벌' 캐릭터지만 인간사회를 잘 풍자한 멜로나 블랙 코미디를 만들어낸 드라마도 있다. 왕자와 공주가 질리지 않는 동화의 주인공이었듯 현대사회에서도 재벌이란 캐릭터는 아마 영원히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삼시세끼'같은 프로그램에서 재미로 노예를 운운하고 속내는 부드러운 까칠한 재벌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여긴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굳이 재벌이 아니어도 되는 캐릭터를 재벌로 만들 필요는 없다.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이 원작 웹툰에서처럼 차라리 건방진 인기 작가였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날카로운 사회풍자나 서민들의 현실을 묘사한 드라마가 보다 많이 제작되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드라마에 재벌 캐릭터가 등장하더라도 그 등장 이유나 배경이 좀 더 분명해져야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드라마라는 통속극, 판타지가 존재하는 이유가 굳이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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