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드라마 '근초고왕'을 바라보는 아쉬움

Shain 2011. 5. 9. 10:10
728x90
반응형
예전부터 사극에 관심이 많다 보니 역사서와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포스팅하곤 합니다. 미드 속 사극이든 영드 속 사극이던 간에 일단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편의 '사극'이 어떻게 재창작된 건지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에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이런 저런 자료를 읽어보기도 하고 상식과 학계의 평가가 어떻게 다른지 따져보기도 합니다. 이해를 위해 일정 수준의 '지식'이 필요한 드라마들이 늘어나는 편이지만 그런 드라마들 중에 '사극'이 주는 의미는 특별히 남다른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가치관이나 국가관이 개입되는 경우도 있고 영웅들의 철학이나 세계관이 포함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사극'에 대해 블로깅하는 포스팅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 그런지 '근초고왕'이나 '짝패'가 방영되기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검색이 급속도로 늘어나곤 합니다. 특히 근초고왕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생소하게 생각하시는 시청자가 많아 드라마 속의 창작된 내용과 실제 사실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시고자 하는 분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근초고왕의 사기는 어떻게 망명을 했느냐, 근초고왕의 사기는 어떤 인물이며, 근구수왕의 어머니는 누구냐, 사기와 여진공주의 이야기는 역사적 진실이냐 등 시청자들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합니다.


사극의 정의에 대해 각각 다른 주장을 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TV에 나오는 '역사 소재'의 모든 이야기를 사극으로 간주합니다. 요즘 같은 '퓨전'이 유행하는 시기에는 엄격한 구분이 힘든 경우가 많지요. 'MBC 조선왕조오백년'같은 편년체 사극에도 많은 부분 창작이 가미되었기 때문에(특히 '파문' 편은 가상의 인물들과 함께 진행이 되었습니다) 정통 사극, 퓨전 사극, 시대극 등의 분류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서가 적은 시대의 이야기는 반 이상이 창작될 수 밖에 없는데 그걸 딱히 '사극'이라 불러야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짝패'같이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은 사극은 '시대극'으로도 분류 가능합니다. 또 시대적인 배경만 과거로 했을 뿐 진행 방식이나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은 현대극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사극도 있습니다. SBS에서 방영된 '자명고'는 사극이라기 보단 현대극과 가까운 분위기로 연출되었습니다. 이런 사극에 대한 시청자의 취향도 상당부분 갈라지는데 흔히 이병훈식 사극으로 일컬어지는 MBC 퓨전사극(대표적으로 동이, 선덕여왕)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KBS에서 주로 제작되는 '용의 눈물'이나 '왕과 비'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도 많습니다.


사극에 대한 분류가 칼로 잰듯 딱 떨어진다기 보단 일종의 '경향성'이기 때문에 MBC 방영 사극은 모두 퓨전이고 KBS 사극은 모두 정통사극이란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신 KBS에서 방영되는 사극들은 '남성적'이라거나 '전쟁신'을 강조한 선이 굵은 사극이 많고 조선 후기를 묘사하는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궁중 암투 보다는 정적 간의 대결. 캐릭터가 선명한 영웅들 간의 대결을 묘사하는 그런 류의 작품들이 훨씬 많아 고정 팬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식의 구분 말고도 사람들이 '사극'이냐 '시대극'이냐를 두고 구분하는 한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는데 바로 '사서'를 얼마나 인용한 후 창작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학설이 분분한 시대의 이야기라면 모를까 상식적으로 알려진, 선명히 남아있는 사서 속 기록을 묘사한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기록 안에서 창작되어야 '사극'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 또한 후손들이 받아들일 만한 국가관이나 철학을 담은 사극이었으면 하는 바람 등을 '사극'에 기대하게 됩니다.

신을 초월하는 능력자들의 활약, 각종 판타지를 두루 포함시킨 'MBC 태왕사신기'를 정통 사극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에 대한 영웅적 묘사에는 뛰어났지만 그 이야기의 드라마틱한 부분들, 엇갈린 사랑이나 사람을 넘어서는 능력을 사서 속 이야기에 연결시킬만한 접점은 거의 없습니다. 사서를 기반으로 한 '창작'이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사람들은 그를 '사극'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회를 향해 달려가는 'KBS 근초고왕'은 최근 실종되어가는 정통 사극 분위기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배신감을 안겨준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왜곡된 사극이며 '사극 버전'의 아침 드라마라 평가하기도 합니다. 본처 위홍란(이세은)을 두고 미친 첫남편(고국원왕, 이종원)에게 고생하던 첫사랑 부여화(김지수)를 첫째부인 자리에 앉힌 왕(근초고왕, 감우성). 두 아내의 아들 중 하나는 간신의 흉계로 평범한 백성으로 자라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는 소프오페라같은 이야기. 최근 퓨전 사극의 범람 속에 드라마 '근초고왕'은 각종 악평에 휘말리게 됩니다.

물론 연기자 김지수의 음주운전, 스태프 불화설과 감우성의 구설, 아이돌 출신들의 연기 학습(?)을 위한 대거 출연, 흑강공 사훌 역을 맡았던 서인석의 폭행 논란, 진승 역 안재모가 도둑을 맞았단 이야기 등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드라마인 만큼 시청자들의 부정적인 불만이 폭발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주변적인 이야기는 모두 무시하고 '백제사극의 탄생' 하나 만을 기대해왔던 시청자들에게도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근초고왕을 주제로 한 사극이라기 보단 '자명고'와 비슷한 하나의 이야기로 간주해야랄 것같단 결론, 훌륭한 복식 고증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 근구수왕의 어머니는 결국 누가 되었을까요? 쇠꼬비(박건일)가 부여화의 아들이니 도무지 왕통을 이을 개연성이 없는 부여화의 아들이 왕이 된단 사실에 반발했었는데 쇠꼬비가 양부모에게 자라다 위홍란의 양자가 되는 덕분에 '진씨'의 아들로 왕위를 잇게 될 모양입니다. 동생인 부여근이 아이부인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덕분에 역사서에 기록된 왕비까지 차지하게 될 것 같네요. 이 드라마엔 최근 특정 연예인의 '옹호론'까지 끼어들어 정통 사극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분위기 보단 누가 왕이 되는게 맞냐를 두고 왈가왈부하기 일수입니다.

창작된 내용으로 새로운 극 형식을 이끌어갈 '대장금'류의 백퍼센트 창작 사극도 분명 필요합니다. 판타지가 가미된 '주몽'이나 '태왕사신기'도 나름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드라마의 발전에 더불어 현대의 시청자들은 그런 류의 사극을 환영합니다. 여러 인간군상들을 표현하기에 '사극'은 효과적이며 알맞은 수단이며 좋은 무대입니다. 그러나 '서동요'류의 사극이 아닌 최초의 정통 백제 사극, 백제 역사극의 원형을 세우길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아침 드라마'는 당치 않습니다.


근초고왕에 등장하는 '사기'는 고구려에서 넘어온 인물로 원래 백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백제에 죄를 짓고 고구려에 갔다가 고구려군 정보를 백제에 일러주어 되돌아온 사람입니다. 드라마는 그를 백제의 유명 성씨인 '사씨()' 집안의 아들로 설정했는데 삼국사기 기록은 '사기(斯紀)'이니 둘의 한자는 다릅니다. 사람들에게 백제를 장악한 대성팔족과 고구려 스파이 노릇을 한 사기의 '한자'가 다르다는 사실은 익숙치 않은 역사에 속하는데 이런식으로 소개된다는 점이 참 아쉽습니다.

백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하나였던 근초고왕은 대체 어떤 왕입니까?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략을 받고서도 이겨낸 백제의 영웅인데 그의 모습은 여인들의 다툼 사이에서 백제를 평정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필부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위례궁과 한성왕궁, 진씨들의 끝없는 갈등, 그들이 일으키는 백제의 내분에 휘둘리는 백성들이 어쩐지 안타깝기까지 한 그런 모습이니 백제 영웅이 고국원왕을 이긴다 한들 그닥 개운한 느낌을 줄 것같진 않습니다. 근구수왕은 진씨 왕후의 '양자'이니 결국 부여화의 아이로서 왕이 되었다고 하기도 힘들고 위홍란(진홍란)의 아이라 하기도 힘들겠네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