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짝패

짝패, 아래적 천둥의 최후와 분노하는 백성의 힘

Shain 2011. 5. 1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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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봐줄 사람 없는 거지패의 고아가 동냥하는 어린아이로 살아간다는 것, 재물은 부족할 것 없지만 어미 잃은 양반가의 자제가 새어머니와 유모의 손에 길러진다는 것. 삶은 각자의 무게가 있기에 저울로 달아보는게 아니라지만 그 둘의 인생을 한눈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귀동(이상윤)이 양반으로서 아래적을 바라보는 눈과 천둥(천정명)이 거지 출신 자수성가한 인물로 아래적을 바라보는 눈은 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릅니다.

귀동은 도둑이란 집단에 '의로울 의(義)'라는 글자를 붙일 수 없다 생각하고 천둥은 지금까지 조선 사회에서 성실히 살아오는 동안 내린 결론, 편법이 아니고서는 경종을 울릴 방법 따윈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귀동이 도둑이란 '편법'을 싫어하는 이유는 김진사(최종환)를 비롯한 안동김씨 일문, 포도대장(심양홍)이나 종사관 등이 아래적을 싫어하는 이유와는 약간 다릅니다.

물론 귀동 역시 양반이란 한계를 지닌, 거지패나 동냥패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윗신분일 뿐이지만 최소한 그가 말하는 '정의'에는 안동김씨들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집념같은 건 없습니다. 권세가진 자에게 들러붙어 한 재산 떼어먹고 권력을 누린 것도 아니고 아래적에게 동조해 사회를 뒤엎겠다 나서지도 못하는 그야 말로 '회색'빛을 띨 수 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지식인이자 양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정자는 호민을 무서워한다' 했는데 들고 일어서는 백성에게 눌려 위정자가 그 못된 마음을 포기한다 했는데 드라마 '짝패' 속의 천둥은 어쩐지 답답하고 지루하게 뒷 부분을 이끌어나왔다는 평을 많이 받았습니다. 첫 부분의 민란, 속시원히 현감의 악행에 일어섰던 사람들은 뒷부분에 와서는 제 한몸 챙기기 바쁜, '정의'와 '분노'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동녀(한지혜)는 천하의 속물이 되어 신분 타령을 해댔고 갖바치 황노인(임현식)은 아래적 더러 역적이라 하며 강포수(권오중)을 욕했습니다. 한번은 분연히 일어설 수 있었는데, 왜 지금은 저렇게 힘없이 나동그라진 영웅이 되고 백성이 되었을까요. 민란으로 인해 죽어간 목숨을 보며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에, 혹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업에 종사해야하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일들은 진작 포기하는게 낫기 때문인가요? 왈자패들에게 억눌리고 포도청 포교들에게 착취당하면서도 그 지루하고 답답한 상황을 떨치지 못하는 건 현대사회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518 민주화항쟁 이후에도 범죄 당사자들을 몰아내지 못한 현대인들의 비극, 드라마 속 답답한 상황이 바로 우리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연기 논란에도 드라마에 시선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게 만들려면

오늘이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던 바로 그날입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라를 장악하려던 신군부에게 저항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총칼을 맞아 죽어가야했던 그날입니다. 발포를 명령했을 그 당사자는 지금도 목숨을 부지하며 대통령직에 있을 동안 부정하게 훔친 재산을 갚고 있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호판은 아래적의 칼을 맞아 단죄를 당했는데 그는 오히려 일부 사람들에게 아직도 대통령이라며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 국민에게 총을 들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극형을 받아 마땅한 인물입니다. 민중을 죽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훔치고, 언론과 미디어를 장악해 자신을 칭송하게 만들었던 그 인물이야 말로 오적 중의 오적이지만 '드라마 속 현실'처럼 그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아직도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조선 땅의 사람들, 그리로 그 뒤를 이은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부당한 일이 있을 때 늘 떨치고 일어나 바로잡으려 했었습니다. 안동 김씨가 조선을 수탈할 때도 외세가 침략할 때도 일본이 강제로 나라를 점령했을 때도 민중은 늘 일어나 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민중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분노한 백성들을 향해 실탄이 든 총을 발사한 공포교(공형진). 무당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출신 때문에 윗선이 시키는 일은 뭐든지 악착같이 해내려 마음먹은 그 인물은 분노한 백성들의 마음은 알려들지 않고 소요를 진압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 전형적인 조선 후기 포도청의 포교입니다. 아무리 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라 한들 같은 백성들끼리는 서로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게 당연한데 그는 분노한 백성들에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거칠게 대하고 그것도 모자라 포도청에 끌고가 가두기도 합니다.

지난번에도 몇번 포스팅했듯이 조선 후기 포도청의 상황이나 민중의 수탈 상황은 드라마 속 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못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삼월(이지수)같은 노비로 막순(윤유선)이나 쇠돌(정인기)같은 도망노비로 살아나가는 천민들의 삶을 좌우하는 건 양반네의 인심이지 국가의 질서도 아니고 인륜도 아니었던 시대입니다. 그 상황에서 공포교처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라는 말에 거부할 수 없었던 사람들처럼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또다른 국민을 착취하는 그런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진득(임성규)이가 함께 하는 왕두령패같은 왈자들, 권력에 기생하는 사람들(정치깡패)도 생겨납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권력자들은 그렇게 힘으로 누르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백성들은 황노인처럼 큰년(서이숙)처럼 굽히고 사는게 제일이라 생각하고 작은년(안연홍)이나 장꼭지(이문식)처럼 양반네들이 힘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그 구조를 그대로 답습합니다. 돈을 주고 가는 아래적을 포도청에 밀고할 땐 희망없는 사람들이구나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때 자신 역시 권세를 가진 자로서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탐하던 현감(김명수), 거지 행색이 된 그가 아내인 삼월의 설득으로 아래적의 편이 되기로 마음을 바꿔먹듯 막순이 호기롭게 덴년의 종문서를 아궁이에 태워버리듯 손녀딸 달이(서현진)가 아래적임을 알고 생각을 바꿔먹는 황노인처럼 사람들 마음 한편에 준비된 따뜻한 마음은 허균이 호민론에서 조장한 '호민'을 따라 일어서는 원민, 항민들이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길 멈추지 않는 한 위정자는 백성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주화항쟁이 직후에는 아무 결과가 없던 것처럼 보였지만 87년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래적에겐 어떤 최후가?

작가는 드라마 중간중간, 아래적에게 그리 밝은 미래가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곤 합니다. 아무리 더럽고 아름답지 못한 나라일 지라도 조정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안전이 보장될 리 없습니다. 망루에 올라가 북을 치는 자의 운명은 강포수처럼 서글픈 죽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달이도, 장꼭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천둥 마저도 이 운명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전봉준 장군과 민란을 일으킨 다른 백성들이 그랬듯 목숨을 빼앗기거나 멀리 도망가게 된다면 마지막회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 '새드 엔딩'이 되겠지요.

아래적의 모습에 조선 사회의 희망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메시지까지 투영되는 지금,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시청자들은 드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굳건한 성곽처럼 요지부동이던 김진사나 동녀의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분이 바뀐 천둥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의 아집과 속물적인 욕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충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귀동에게 천둥은 무엇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짝패입니다.

최소한 아래적의 사람들 중 천둥 만이라도 목숨을 구해 다른 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래적은 백성들의 또다른 희망이 되어 미래에 '썩은 세상'이 도래했을 때 '전설'처럼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후학을 기르겠다는 동녀와 기꺼이 굳은 마음을 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다면 희망은 이어질 수 있는 것이겠죠. 다음주면 짝패도 32부의 대장정을 마칩니다. 31년전 5월 18일 많은 사람들의 피가 이 땅에 물들었습니다. 그들이 왜 항거해야만 했었는지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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