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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탈, 서러운 독립군의 슬픔을 대변하는 이름 담사리

Shain 2012. 8. 3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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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이름을 가졌다는 자체가 신분을 증명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반가의 후손이 아니면 제대로된 성과 이름을 얻기 힘들었고 남의 집에서 종살이하는 사람들은 부모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 일월, 삼월, 돌쇠같은 즉 '아무개'와 거의 다르지 않은 호칭을 얻곤 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땐 정성들여 지은 이름은 먹고살만한 집의 귀한 아이를 위한 호사같은 것이었습니다. 70년대까지도 여자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언년이나 간난, 개똥이로 부르다가 말숙, 종말같은 대충 지은 이름을 호적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각시탈'에 등장한 독립군대장 이름은 담사리(전노민)였습니다. 담사리가 무슨 뜻인가 알아보니 '꼴머슴'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 '깔담살이'에서 나온 말이더군요. 어릴 때 머슴살이로 들어간 아이는 어른들처럼 제 몫은 하지 못하고 땔감할 나무를 줏어오거나 소먹을 풀(꼴)을 베어오는 일을 하니 '꼴머슴'이라 불렀습니다. 어린아이가 머슴살이하는 모습도 짠한데 밥값이라도 하겠다며 꼴베고 아둥바둥하는 모습이 그려져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이름도 제대로 못얻은 소년이 '담살이'라 불리며 고생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담살이 출신 의병장이었던 안규홍. 안담사리 의병장으로 불렸다.


'각시탈'의 담사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행적을 가진 독립군이나 광복군은 없습니다만 1900년대 초반 활약했던 의병장 중 하나의 이름이 '안담사리'였습니다. 1907년 7월 한국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군 보병 14연대는 '진중일지'를 통해 당시 활약하던 조선 의병에 관한 기록을 남깁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많은 사람들이 자결하거나 울부짖으며 조국의 비극을 슬퍼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였던 안담사리는 본래 양반가 후손이었지만 가세가 기울어 어릴 때부터 머슴살이를 했고 '안규홍'이란 이름 보다 '안담사리의병'으로 더욱 잘 알려지게 됩니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안담사리는 일본군경을 수차례 공격하여 명성을 얻었고 1908년 일본군 14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백성들에겐 피해를 끼치지 않으니 이 '머슴군의병'을 도와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양반가의 유생들도 안담사리 의병에 적극 투신하고 각종 물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한국땅으로 들어온 일명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이던 일본군 부대에 의해 안담사리 의병장은 1909년 9월 25일 체포되고 1911년 5월 5일 대구감옥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각시탈'에서 신출귀물하며 형장을 탈출하던 '담사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이재유를 떠올렸습니다. 공산주의자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재유는 두 번에 걸쳐 탈옥에 성공한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경찰들은 검문을 강화하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처럼 때로은 판사로 때로는 농사꾼으로 묘사해 '왜경'들의 눈을 속입니다. 어떤 경우엔 자신을 감시하는 순사를 설득하여 탈옥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지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동지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거짓 자백까지 했다고 하니 보통 사람이 넘는 배짱과 기개입니다.

왼쪽이 이재유의 진짜 얼굴 오른쪽은 변장하고 잡혔을 당시의 사진.


한번은 탈출 후 경성제대 교수의 집에서 굴을 파고 38일간 숨어지내기도 하고 한번은 경상도 사투리를 써가며 수해 이재민으로 위장하기도 하고 또 한번은 밥알을 짓이겨 족쇄에 넣고 모양을 본 뜬뒤 우유통 뚜껑으로 열쇠를 만들어 족쇄를 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질 환자에게 자신의 저녁을 주고 그 환자가 간수를 졸라 화장실에 간 사이 경찰서 정문을 빠져나오기도 하고 화장실에 간다며 부탁했다가 그대로 빠져나가기도 하는 등 경찰들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것 보다 경찰을 우롱한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일본 경찰을 조롱하던 그도 결국 1936년 12월 다시 검거되어 수감되었다 1944년 교도소 내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죠. 1936년 이재유를 검거한 순사들은 신이 나서 변장한 이재유와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검거 당시 농민으로 무장하고 있던 이재유와 기념촬영을 하던 순사들의 모습을 빗대 극중에서도 이강토(주원)와 담사리가 기념 촬영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죠. 일제는 두 번이나 탈옥했던 공산주의자 이재유를 잡았다며 기고만장해 어용신문에 기사를 싣습니다. 순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변장한 이재유의 사진이 대서특필된 기사는 지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이재유 역시 담사리 만큼이나 변장과 위장에 능했다고 한다.


알고 보면 '각시탈'의 담사리는 실존 독립운동가들의 겪었던 슬픔을 모두 담은 서러운 캐릭터입니다. 아내가 운명하는 것도 지켜보지 못했다는 드라마 속 양백(김명곤)의 서러움,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각시탈을 돌보는 목단(진세연), 그리고 각시탈과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문 중 자결한 적파(반민정)와 가족들이 모두 죽었음에도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동진(박성웅)의 남모르는 아픔. 그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목숨을 거는 동안 누군가는 살아보겠다며 아둥바둥 친일을 하고 누군가는 일본 앞잡이로 호의호식을 하고 있었죠.

수시로 물 속에 머리를 쳐박고 자백을 강요하는 순사들.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대못상자에 들어가 피흘리는 그 모습과 밥을 굶겨 양백 선생이 입으로 밥을 물어다줬다는 일화는 최소한 한 인간으로서 존엄 조차 보답받지 못한 그들의 인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담살이'로 불리던 노비에게 대체 무엇을 해주었기에 그들이 그리 고통스럽게 죽어야했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독립운동으로 인해 그 후손들이 아직까지 고생하고 있으며 제대로된 보상은 커녕 같은 나라 국민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어본 사람들입니다.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글자 한번 배운 적 없는 깔담살이가 무슨 영광을 보고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조선의 혜택이라곤 조금도 입어본 적 없는 평민 출신 양백이 무슨 영화를 바라고 만주땅을 헤매고 다녔을까요. 그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세워졌지만 그들의 이름은 점차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 땅의 평범한 백성이었고 한때는 독립투사였던 그들이 말입니다.

모래사장의 모래알 만큼 많은 각시탈이 있다.


최근 인터넷에서 '흔한 반도의~'라는 표현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씁쓸한 생각이 자주 듭니다. '각시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을 '반도'라 부르고 일본을 '내지'라 부르라 강요했습니다. 그들에게 빼앗긴 이름 '대한제국'과 그들에게 되찾은 땅에서 얻은 나라 이름 '대한민국'이 있는데 아직도 그 후손들은 이 나라를 반도라 부릅니다. 때로는 '담살이'라 불리고 때로는 이름도 없이 죽어간 이 나라의 독립투사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서글픈 그들이 얼마나 듣고 싶어한 이름인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일까요.

어쩐지 코끝이 시려오는 담사리의 죽음. '조선 땅에는 수많은 양백과 동진이 있다. 모래사장의 모래알 만큼 많은 각시탈이 있다'는 담사리의 마지막 말처럼 언젠가 우리 나라에 다시 위기가 닥치면 누군가는 다시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 지도 모릅니다. 애국이란 결국 같이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최소한 그들처럼 용감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남겨준 뜻 만은 잊어버리지 않는 그런 동지가 되어야하는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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