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side/오락가락

'무신'과 '대왕의 꿈'그리고 우리 나라 영웅사극의 문제점

Shain 2012. 9. 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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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가 '사극'입니다. 요즘은 '사극'의 의미가 한복을 입고 왕족 코스프레하는 드라마로 바뀌었다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한 이야기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교훈이 현대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새삼 느껴보기도 하고 정사를 벗어난 퓨전을 보며 사극도 새로운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사극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출연 배우들의 발성 때문입니다. 그 어떤 드라마 보다 발음이 정확하고 발성이 뛰어난 배우들은 사극 만의 고유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공중파 채널에서 실종된 '정통사극'에 대한 아쉬움도 없잖아 있습니다. 최근엔 SBS '신의'나 MBC '닥터진' 또는 '해를 품은 달'까지도 사극으로 분류하는 분들이 많지만 엄밀히 이 드라마들은 판타지이고 '정통사극'과는 거리가 멀죠. 또 KBS '광개토태왕'같은 드라마는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긴 했으나 등장인물의 반 이상이 가상 인물이고 묘사한 내용도 대부분 창작된 것입니다. 이런 류 '창작 사극'은 정통사극과 거리가 먼 것은 물론 그 세계관 조차 통일된 모습을 보이지 않아 '화려한 볼거리' 수준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김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드라마 '무신'

최근엔 MBC '무신'과 KBS '대왕의 꿈'을 시청중입니다. 두 드라마 모두 양 공중파에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사극이다 보니 꽤 많은 자본이 투자된 모양입니다. 특히 '무신(武神)'은 우리에게 생소하던 무신정권의 영웅 김준(김주혁)을 주인공으로 삼아 고려사에 충실한 대본으로 드라마를 끌고갑니다. 최우(정보석)가 동생 최항(정성모)과 야합한 구 기득권을 물리치고 당당히 최충헌(주현)의 후계자 자리를 거머쥐는 장면도 흥미진진했고 '인물열전'이라 해도 좋을 고려사 속의 무신들이 되살아난 모습은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드라마 자체만 보자면 최근 방영된 사극 중에서 '무신' 만큼 잘 만들어진 사극도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꾸미기 위해 최우의 딸 송이(김규리)를 끌어들인 것하며 잔인하다 싶을 만큼 격한 고문장면에 목숨을 건 격구 장면까지 이 정도로 정통 역사와 볼거리를 결합한 드라마도 찾아보기 힘들죠. 그리고 극 초반에 묘사된 정신이 오락가락한 최충헌과 그를 둘러싼 간신 김덕명(안병경)이라던가 돌팔이 주술사 최산보(이남희)의 연기는 정말 그럴듯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무신 정권을 조명하기엔 탁월한 등장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세출의 영웅 김준이 승려일 때 느꼈던 무아지경을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 넘는 장면으로 연출한 것도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일개 노예에 불과하던 김준이 자신의 능력과 신분을 넘어 고려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건 그 순간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나날이 성장한 김준은 교정별감 김약선(이주현)을 뛰어넘고 최우에게 인정받아 최우의 친아들인 만전(백도빈)의 후계자까지 쳐내고 도방의 주인이 됩니다. 아무리 노예도 장군이 될 수 있는 고려시대라지만 노예가 문하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죠.

최우와 김준에 대한 평가는 상당부분 상반된 구석이 있다.

허나 '잘 만들어진' 드라마 '무신'의 문제는 노예 김준의 성공담을 묘사한 것까진 좋았는데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데 있습니다. 무신정권은 한동안 고려의 황제들을 갈아치우며 고려황실 섭정으로 그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때로는 무신들끼리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을 했고 수십년 간의 여몽전쟁 동안도 그들의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강화도로 천도하고 고려 땅의 백성들이 몽고군과 맞서는 동안 권력을 두고 대립한 '무신'들에 대한 평가는 현대사에서도 엇갈리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여몽 전쟁 기간 동안 승리한 전투는 김윤후나 홍지같은 인물이 이끈 백성주도의 전투가 훨씬 많았구요.

물론 황제를 갈아치우지 않고 무신이 아닌 문신을 등용하며 전쟁 기간 동안에도 안정을 꾀한 최우의 업적은 다분히 인정되고 강화도에서 버틴 그들의 업적 덕분에 '고려'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지 않았냐는 평가도 있습니다만 백성들이 피흘리고 버티는 동안 강화도의 무신들이 호의호식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준과 최우는 권력의 정점에 선, 남들 보다 뛰어난 자는 될 수 있어도 초인이 아니거니와 큰 뜻을 지닌 영웅이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여색과 재물 그 어느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않고 고려를 우선했는지 권력을 우선한 인물이었는지 조차 헷갈리는 사람들입니다.

꽤 '잘 만들어진' 사극 '무신'은 김준을 과도하게 영웅화시키는 시점에서 판타지가 되버립니다. 극중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배후로 등장한 김준은 무소불위의 군부 권력 앞에서도 의연한 것처럼 묘사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자리, 황제나 부하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지닌 그 권력을 가지면 미치광이 최항같은 인물도 합하라 불리며 추앙받습니다. '김준'을 긍정적 관점에서 그린 것은 좋았으나 대몽항쟁을 명분으로 독재까지 정당화하며 죽는 순간까지 양아들 임연(안재모)을 격려하는 모습은 보기가 껄끄러웠습니다. 그나마 친몽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던 이장용(이석준)과 원종(강성민)의 입장을 비중있게 묘사한게 다행이랄까요.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삼국사기식 신화 '대왕의 꿈'

'대왕의 꿈'같은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춘추(최수종)가 삼한일통을 이룬 영웅이라는 점은 교과서도 역사가도 인정하는 부분이겠으나 그가 귀문에서 죽임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며 신라 골품제의 비극을 느낀 것처럼 묘사한 장면에서는 솔직히 비웃음이 났습니다. 공주의 아들에 정통 귀족이고 성골 선덕여왕의 조카인 그가 나는 왜 하필 성골로 태어나지 못했는가 한탄할 수는 있겠지만 백성들을 보며 신분제도를 비판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집중하고 있는 영웅 김춘추와 영웅 김유신(김유신)의 신화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다수가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의 인물이란 점도 참 재밌습니다. 아직까지도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쓰인 골품제 즉 '성골'과 '진골'이 어떻게 정확히 다른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화랑세기에서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으로 '인통' 즉 왕비 집안을 구분하고 그들의 혈통과 정통성에 따라 성골과 진골이 다르지 않을까 추측하는 사람들만 늘어났을 뿐입니다. 화랑세기는 대원신통 미실을 비롯한 '박씨'들의 권력 다툼을 묘사하는데 비해 '대왕의 꿈'은 인물은 화랑세기에서 빌려왔지만 김씨들의 왕위 계승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결합한 새로운 드라마 속 판타지 세계가 태어난 셈인데 등장인물은 '신국의 도'를 섬기는 화랑세기 중심의 인물들이면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속 등장인물들과 유사하니 이걸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극중 숙흘종으로 등장하는 배우 서인석이 과거 김유신으로 등장한 '삼국기(1992)'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20년전 그때 드라마 보다 선덕여왕과 다른 인물들이 다양해진 건 반가운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김유신과 김춘추의 영웅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 역할일 것으로 보여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합니다.

구태의연한 영웅사극의 매뉴얼 벗어날 때도 됐는데

애초에 신라는 박, 석, 김씨가 교대로 왕위를 잇던 나라니 박씨들의 권력 추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김춘추와 김유신도 그 복잡한 신라 귀족사회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입니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김춘추와 김유신을 영웅으로 정해놓고 이야기를 끌고 가다 보니 상대방은 무조건 악역입니다. 역사의 승자라는 점은 어쩔 수 없어도 인간적으로 진솔하게 드라마를 만드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영웅사극'은 힘든 고난을 이겨낸 만능형 주인공이 자신의 편이 될 사람들을 끌어모은 뒤 정적을 물리치고 왕이 되는 매뉴얼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무엇 보다 이들 '영웅사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 사극이 '정치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정 사극 속 인물이 인기를 끌면 그 정치인이 특정 정치인 '누구'와 닮았다는 컬럼이 작성되기도 하고 극중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제작된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대왕의 꿈'이 구태의연한 영웅형 묘사에서 벗어나지 못한건 어쩌면 '영웅'을 원하는 심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타고난 왕족 계급이 개혁를 운운하는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게 됩니다('무신'은 그런면에서 좀 낫나요).

김춘추는 아무리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신라의 왕족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암살 음모를 엮어 드라마로 꾸미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어떤 즐거움을 선사하는 걸까요. 촬영기법은 신선하고 천관녀(이세영)는 아름답고 선덕여왕(선주아)은 우아하지만 이 드라마는 볼 때 마다 불편합니다. 역사 속 인물을 창작의 소재로 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 인물은 절대로 '완벽한 영웅'이 아닙니다.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고 실존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까지 방해하는 이런 구태의연한 관점을 이제는 버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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