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마의

마의, 숙휘공주의 현옹과 백광현의 사람을 살리는 칼

Shain 2013. 2. 2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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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드라마 속 시대의 한계와 문화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요즘은 현대인 취향에 맞춘 트렌디 사극이 많고 발성까지 현대극 발성이라 사극이라기 보다 한복입은 시대극 코스프레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대의 가치관과 문화를 잘 표현하는 묘사는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지난주 '마의'에서는 두창이 창궐하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두창을 견뎌내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별효과없는 미신이고 자기 만족일 뿐이지만 특별한 약도 처방도 없는 두창을 조상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죠.

숙휘공주(김소은)처럼 숙종은 두창을 앓고 완치된 적이 있습니다. 한달 동안 두창을 앓던 숙종은 마지막 단계에서 현옹 때문에 약도 물도 마시지 못하는 위기 상황에 처합니다. 천연두의 수포는 피부 표면뿐만 아니라 입안에도 생기는 법이라 입속부터 인후까지 자리잡은 종기가 가라앉지 않은 것입니다. 백광현은 자신이 고안한 길고 날카로운 침으로 인후의 종기들을 터트렸고 드라마 속 숙휘공주가 그랬듯이 숙종 역시 피를 뱉어내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광현은 이처럼 한의학 고유의 피침 이외에도 직접 고안한 특별한 침들을 많이 이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백광현의 현옹 치료로 의식을 되찾은 숙휘공주. 현종은 매우 기뻐한다.


드라마 속에서도 그렇지만 실존인물 백광현도 과격한 치료법을 주장한 용감한 의원이었습니다. 말과 사람을 치료한 다년간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를 살리기 위해 남들과 다른 방법을 선택하곤 했다는데 그중 하나가 스스로 고안한 침입니다. 때로는 무언가를 긁어내기 위해 끝이 굽은 침을 사용하기도 하고 피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식하게 큰 침을 사용하기도 했고 가느다랗고 길쭉한 침을 이용해 시술할 때도 있었습니다.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환부에 알맞은 침을 이용하는 것이지 말에 쓰던 것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백광현의 두번째 남다른 점은 의서에 없는 치료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극중 최형욱(윤진호)은 현옹 환자를 한번도 본적이 없으면서도 숙휘공주의 두창을 악화시킨 후 현옹을 치료해보겠다며 덤볐습니다. 백광현(조승우)는 이런 최형욱의 음모를 알아내고 시료를 중지시킨 후 현종(한상진)의 담석 치료를 주장할 때처럼 겁없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침을 공주에게 이용하겠다니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기겁할 방법입니다. 현종의 담석도, 오규태(김호영) 대감의 탈저도 모두 책에는 없는 방법이었으니 백광현의 말이 맞아도 조선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측하게 생각했을 법합니다.

우리 둘 다 백광현의 의서에도 없는 치료법으로 살지 않았느냐. 오규태 대감의 설득에 현종은 허락한다.


결국 백광현의 이런 장점은 의원으로서의 창의성과 진정성에 연결됩니다. 생명을 살리고 싶으면 자신의 지식과 방법을 총동원해야한다는 진심이 있기에 고주만(이순재)의 부골저 시술을 자진했고 숙휘공주에게 마침을 쓰겠다며 현종을 졸랐습니다. 절개법도 새롭게 개발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누구든 살리겠다는 백광현의 진심이 이런 시술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허준도 약을 절대로 써서는 안된다는 미신이 있던 두창을 치료하려 탕약을 처방해 광해군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 왕실에서 '금기'를 깬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입니다.

요즘이야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고 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면 치료를 담당한 의사를 용서해주는 법도 있습니다만 조선 시대는 일종의 '의료 사고'에 대해 훨씬 엄격했습니다. 특히 왕실의 의료사고는 의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중대한 사건으로 왕이 노환으로 죽었을 지라도 담당 어의의 책임이 크다며 벌을 내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허준 역시 선조의 죽음으로 유배형을 받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백광현처럼 숙휘공주를 살릴 수 있다고 왕앞에서 장담한 사람은 거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봐야죠.

만약 숙휘공주가 죽었다면 백광현은 목숨을 내놓았어야 한다. 의원으로서의 진정성이 엿보이는 상황.


드라마 '허준(1999)'에서 병을 반드시 치료할 것이라 약속했던 허준이 손목을 잘릴 번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허준의 환자인 공빈의 남동생이 했던 말이 있죠. '궁중에는 희언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중국 속담인 '군중무희언(軍中無戱言)'에서 유래한 것으로 궁에서는 함부로 약속을 하거나 장담을 해서는 안된다는 격언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백광현이 고주만의 부골저 시술에 실패해 사형을 받을 뻔한 것도 이런 관행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왕실의 엄격한 상황을 뻔히 알고 그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은 백광현이 다시 한번 현종에게 시술을 하게 해달라 조른 것입니다.

물론 드라마와 달리 실제 상황은 백광현이 숙종과 세자빈(경종의 첫아내)을 치료할 때 다른 의관들은 불가능하다 주장하는 시술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고 그를 믿는 임금이 백광현의 손을 들어준 것이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의원에서 확고한 처치법을 발언하는 자체가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임금이 신뢰해도 조정 대신들이 반대합니다. 남인과 서인의 다툼이 한참이던 그 위험한 조선 조정에서 백광현은 자칫 정치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는 상황이나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그의 진심과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모두 인정한 까닭인지 죽을 때까지 별다른 충돌은 없었습니다.

숙휘공주는 고쳤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은 백광현. 다음 환자는 왕실의 누가 될까.


의관들에겐 자신이 약속한 말에 책임이 따릅니다. 최형욱처럼 두창 치료하다 죽으면 어쩔 수 없다던가 이명환(손창민)처럼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치료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의사의 자세가 아니겠지요. 목숨을 걸면서까지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현대인들이 바라는 판타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환자를 치료하지 못했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의사는 없습니다. 백광현은 진짜 목숨을 걸어야했던 그 시대에 치료를 장담하고 침을 들었으니 그 의지야말로 '신의'다운 행동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마의에서 최고로 미움을 받는 존재가 대비 인선왕후와 사이코패스 최형욱이죠. 특히 최형욱은 감히 숙휘공주를 위험하게 했다는 죄로 역할 자체를 부정당했습니다. 최형욱은 '치종지남'이라는 궁극의 병기를 가진 의원이나 오히려 백광현이 의서를 뛰어넘는 의원임을 증명하는 극적 장치로 전락했습니다.

숙휘공주가 이대로 죽기라도 했다면 최형욱은 아마 '마의' 팬들의 원망을 모두 받아야했을 것입니다(정말 다행입니다). 침은 최형욱같은 사람이 들면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되지만 백광현같은 의원이 들면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됩니다. 칼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환자를 먼저 생각하고 환자와 함께 호흡하는 진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 백광현 이제 다음 임무를 향해 나아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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