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풍선/말풍선수다

새해를 맞아 들려주는 옛이야기 - 황소고집의 유래, 방촌의 처세술

Shain 2008. 1. 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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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하시는 모든 분들께 새해 인사를 = 2008년 한해 행복하세요

작년 연말(벌써 작년) 좋은 꿈을 꾸고 새해를 맞은 Shain입니다. 워낙 기묘한 꿈이라 자세히 적을 수는 없지만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는군요. 지난 한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올 한해도 많이 바쁘게 움직이고 달려야 합니다.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도 모두 새해에 행복한 일 많이 만드시고 따뜻하고, 즐겁고, 활기찬 꿈을 많이 이루시기 바라겠습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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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의 주인공 - 조선시대의 유명한 정승, 방촌 황희

길이 미끄러워 차량운행이 힘들다고 하니 내일 이 부근 절에서 가지기로 했다는 해돋이는 글렀다는 소문이고 아마도 이 눈내리는 풍경이 새해의 첫 풍경이 될 것 같다. 새해의 첫 이야기는 이 지역 어른들이 들려준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1452)'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곳은 유난히 황씨가 많은 집성촌이다. 방촌 황희의 후손들이 단체로 군락을 이루어 산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구전되는 야사들이 제법 많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정확한 출처를 따지기 힘든 옛날 이야기를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처럼 적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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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부근의 눈내린 풍경. 멀리 걸어 가서 들판을 가로막은 산을 찍고 싶었는데 바람이 차고 거센 까닭에 집앞에서 총총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눈이 얇게 겹겹이 쌓여 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서 1월 1일이 되면 산을 넘을 수 없을 것 같기에 12월 31일에 귀가를 서둘렀다. 눈으로 미끄러운 까닭에 평소 보다 2배의 시간이 걸리는 도로 주행, 그리고 차갑게 부는 바람과 눈발이 올해도 새해를 맞는 매서운 산과 들판에 들이치고 있다. 벌판에 거주지를 삼은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찬 바람에 익숙하다. 난방비와 연료 걱정이 많아서 나무 보일러, 연탄 보일러, 심야전기 같은 2차 에너지 대책도 자주 세우는 지역이다.

눈이 내린 까닭에 지금 이곳이 상당히 고요하고 평화롭다. 마치 예전 역사가 돌아온 듯. 지금 분위기로는 산 속에서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내려와 민가의 보일러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다 이곳에 방촌 황희의 후손이 살게 됐을까? 그리고 그 숨겨진 이야기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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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에 있는 황희의 동상. 황희가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야사와 민담에 전해지는 정승 황희는 청백리의 표상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황희는 청백리와 청렴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사돈과 사위의 비리를 감싸다가 자신의 편을든 친구 맹사성과 함께 된통 혼이 난 고위 관리, 서자의 비리를 감싸준 관리, 뇌물을 받아먹은 관리로서의 면모가 적혀 있다고 한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비가 새는 것은 기본이오 자녀의 혼수를 마련할 돈도 없이 굶었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진실일까?

영웅이 존재하고, 인간이 완벽하다는 발상은 옛날이나 현재나 무리한 생각이다. 잘못은 잘못인 채로 업적은 업적인채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어른들에게 여쭤보니 아마 황희가 가난했던 것은 사실이었을 거라고 한다. 다만 당시에는 신하의 녹봉을 제대로 지급한 적이 거의 없어 생계를 잇기 힘들었던 황희가 현대로 치면 정치자금에 해당하는 생계비를 다른 관리들로부터 보조받지 않았을까 싶단다. 당시의 관점으로는 진심어린 후원(그럴 리가)이니 무리한 풍경은 아닐 거라는 이야기.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이지만 역사의 판단은 읽는 분들에게 맡겨야할 것 같다.


황소고집 유래는 과연 무엇?

네이버 사전이나 다른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로 '황소고집'이라는 단어를 치면, '쇠고집'과 동의어로 다루기 힘든 소라는 동물, 그 중에서도 황소의 고집을 지칭하는 단어로 보인다. 지식인의 유래를 묻는 질문들에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쪽으로 대답을 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말이 맞는 것 같다(어릴 때 한우를 몇번 본 적이 있지만 고집이 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암소이기 때문일까).

그런데 이 지역의 어른들이 전해주는 야사같은 이야기는 '황소고집'을 '황씨'와 '소씨'의 고집으로 해석하고 있다. 황씨성을 가진 누구냐와 소씨성을 가진 누구냐 역시 불분명한데 역사서나 다른 웹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설이거나 기록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 역사서에 정통하지 않으니 이 부분은 정확히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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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의 상징. 황소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날 유명한 관리였던 사람, 황씨가(아마도 방촌 황희, 소를 타고 다닌 정승으로 유명한 건 동시대 인물인 맹사성도 마찬가지이다) 소를 타고 지방을 떠돌아다니는데 어느 작은 고을의 관리 소씨가 평소 그 관리를 존경하여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거한 밥상을 차려 대접했다고 한다. '내 평소에 당신의 명망을 듣고 몹시 뵙고 싶었으니 내 정성으로 마련한 이 소박한(?) 밥상을 부디 받아 달라'며 극진히 대접한 그 관리.

그러나 '한때 관리 위치에 있었던 자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이렇게 과한 대접은 받을 수가 없다'며 황씨와 소씨는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다툼과 대치가 3일 이상 이어져 음식은 다 상하고 두 양반은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었으나 아무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꺾을 수 없는 지독한 고집을 '황씨'와 '소씨'의 고집이라 하여 황소 고집이라 했단다.

두 사람의 말싸움은 지독한 고집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은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자 했던 두 사람의 다툼은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방촌 황희의 처세술 혹은 보신책(保身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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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의 영정

고려말에서 조선 세종 때까지 관리로 일하다 사망한 방촌 황희는 고려의 패망과 조선의 부흥을 함께 지켜본 사람이다. '네 말이 옳소'라고 아무도 편들지 않은 일화는 이런 거친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황희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단면인지 모른다. 나라가 망할 때 많은 사람이 숙청당하고 나라를 세우고 나서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성군이라는 세종 역시 기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정치가로서 대신으로서의 인생이야 목숨을 걸고 발언하는 자리이니 자신의 한 목숨은 잃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자칫하다가 후손을 전혀 남기지 못하는 처지에 이를 수도 있다. 태종에게 충녕대군이 보위를 잇는 것은 부당하다 조언했다 귀양간 이후에 그런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이야기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록이나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자를 제외한 방촌 황희의 적자는(딸은 제외) 3명이었다고 한다. 그 아들 셋을 각각 여러 지방에 장가를 들였는데 큰 아들은 본관 장수에서 터를 잡았고, 둘째 아들은 경북 상주 최씨에게 처가살이하듯 장가를 보내고, 셋째 아들은 파주 부근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각자 멀리 보낸 이유 중 하나 특히 처가살이하듯 경상도 멀리까지 아들을 보낸 이유는 정치적인 엄벌을 받게 되어 멸족할 처지가 되면 셋 중 하나라도 살아남아 후손을 이으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덕분에 방촌 황희 이후에 특별히 정치계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할만한 후손은 없지만 전국 여러곳에 집성촌을 이룬 곳은 찾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 부근 서원에서는 방촌 황희의 위패를 모신 곳이 많다.

나름대로 후손을 살리고 번성하는데는 성공하여 그의 뜻을 이뤘다고나 할까. 정치적으로 성공하여 정계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 행복한 것 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한편으론 목숨을 걸만큼 정치에 소신을 걸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정치적으로는 가치관이 선명하여 고집이 세고 뜻이 단호하나 처세술에 있어서는 편을 들거나 치우침이 없고, 후손에 대해서는 멀리 생각하는 그의 뜻이 가히 현명하다 할 수 있다. 청백리로서가 아닌 실록에 기록된 그의 모습이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는 다를 수 있지만(이 부분은 재평가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인으로서의 견해는 정책과 미래를 생각해야하는 요즘 깊이 새겨야할 교훈이 아닌가 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포토앨범
http://bgs.hs.kr/dapsa/kyungki/03hwanghe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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