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옛날 옛적 그 드라마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여성주의 드라마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Shain 2013. 5. 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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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여성주의'하면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떠올립니다.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라면 두 단어를 그렇게 연결시키는 것이 맞지만 요즘은 단어의 본뜻과 사회적 의미가 다르고 단어에 따른 개개인의 개념도 천차만별이라 전달하고자 하는 뜻과 달리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가 잘못 받아들여진 만큼 그 본래의 취지도 많은 부분 왜곡되어 버렸죠. 저는 '페미니즘'이라는 기형이 된 용어보다 여성의 관점과 경험을 중시하는 '여성주의'란 단어를 선택하겠습니다.

예전에도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와 영화, 소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가 기존 남성 사회의 가치관에서 바라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기에 여성 주인공들도 기존 사회의 관점에서 해석되곤 했습니다. 사서에도 적히지 않은 야사 속 악녀 장옥정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 '요화 장희빈(1968)'은 남자의 야망과 정열은 용납해도 여성의 욕망과 사랑은 허용하지 않는 관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성주의 영화는 여성의 심리와 관점에서 현상을 보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은 유난히 여성주의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곤 했습니다. 브래드 피트의 데뷰작으로 유명한 '델마와 루이스(1991)'라던가 '올란도(1992)' 같은 영화도 여성주의로 분류되곤 하는 영화들이죠. 우리 나라도 이런 열기에서 예외는 아니라서 영화도 영화지만 드라마 부분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여성주의 경향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페미니즘이라기 보단 여성의 삶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담은 드라마들이었죠.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자꾸자꾸 늘어만 가지만 여성 특유의 심리와 고찰을 담은 드라마는 어쩐지 점점 줄어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니 가끔은 솔직한 심리를 담은 드라마가 만들어지긴 하는데 섬세함과 진지함은 사라지고 멜로와 코미디만 남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마다 보고 싶어지는 드라마가 주찬옥 작가와 황인뢰 PD가 제작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1990)'입니다.



주찬옥 작가의 대표 여성주의 드라마인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고개숙인 남자(1991)', '여자의 방(1992)'은 독특한 시선과 전개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고개숙인 남자'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혼외자를 낳게 된 한 가장과 그를 존경했으나 결혼전 낳은 아이와 납득할 수 없는 가치관 때문에 갈등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그리는 동시에 그 부모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들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방'은 성격이 다른 세 여성의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죠.

그중에서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세 모녀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잔잔한 이야기로 섬세한 심리 묘사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부모가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하고 가정에 올인해서 사는 여성들이 흔하던 그 시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혼자 살게 된 정희(김혜자)와 딱 부러진 신세대 여성이지만 남자와 삶에 대한 불안을 감지하고 있는 딸 영건(김희애), 그리고 일찍 찾아온 사랑에 쫓았지만 희귀암으로 죽어야했던 딸 영채(하희라)의 이야기가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정희'가 만난 남편은 아내에게 소홀하면서도 쓸쓸해하고 헤어진 아내와 딸을 그리워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희는 그런 남편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다가도 다시 다른 여자와 재혼해버리는 그 남자를 증오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희는 남편과 외도했던 그 여자(박원숙)를 자신의 친구로 가까이 지내며 정희의 딸 영채와 영건은 그 여성을 '고모'라 부르며 가족처럼 지냅니다.

남자 하나를 두고 여자들끼리 다투던 기존 드라마 설정을 탈피한 것은 물론 여성과 여성을 라이벌이나 적이 아닌 동료로 간주하는 이런 태도는 자매들과 엄마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여자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 많이들 잊고 살곤 하지요. 물론 가장 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긴 영건에겐 쉽지 않은 선택일지 모르겠지만 죽어버린 동생 영채와 혼자 남은 엄마를 보며 영건 역시 아버지가 재혼해서 낳은 의붓 남동생과 어렵게 화해하게 됩니다.

주찬옥 작가의 '고개숙인 남자(1991)'와 '여자의 방(1992)'.


무엇 보다 이 드라마는 격한 갈등도 없고 사람을 확 사로잡을 만큼 자극적인 캐릭터나 사건 - 영채의 죽음을 빼면- 도 거의 없습니다. 그 고요한 풍경 속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느끼는 세 여자와 엄마와 자매와 딸을 가족이 아닌 한 사람의 여성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선과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성찰이 묵직하게, 마치 여운이 긴 피아노 음색처럼 가슴에 파문이 퍼져나갑니다. 이야기만 듣고 느끼기는 힘든 감동이 담긴 드라마죠.

이 드라마는 '여성주의' 색채 외에도 배우들과 OST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 시대 드라마치고는 OST 음반이 상당히 큰 인기를 끌었는데(절판되어 구입이 힘들더군요, 링크를 누르면 1분 미리듣기가 가능합니다) 요즘 드라마 제작자로 유명한 송병준씨가 작곡한 음악입니다. 위에 참고자료로 첨부한 '해피타임'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김혜자, 김희애, 하희라, 박원숙, 노영국, 안정훈, 천호진, 박성미, 정한용, 송재호, 맹상훈, 이희도 등 연기파 배우들도 다수 출연합니다.

그때 드라마가 보여준 '여성주의'는 획기적이고 거칠고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인 관점에서 재단하고 판단하던 것들을 다른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자는 작은 움직임이었을 뿐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여성주의의 본질은 격하고 역동적인 것이 아닌 작고 조그만 것으로 관점을 옮기는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화려하고 심란한 드라마가 범람하는 요즘,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 1위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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