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하면 예전에는 민족대이동부터 떠올랐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짐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귀성 인파 중 한명이었구요. 안 그래도 차타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고 가며 멀미하느냐 애먹은 기억이 납니다. 요즘은 설날을 지내는 풍경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낍니다. 여전히 고향을 찾고 시댁과 친정을 오가는 부부들이 많지만 설날에도 평범한 날과 똑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오히려 평소 보다 남는 시간에 여유를 즐기거나 외로워하는, 혼자 사는 사람들도 늘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좀 더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 거죠.
그러나 저희 집의 설 풍경은 예년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주변 친지들이 찾아와 정신없이 제사를 지내면 작은 할아버지댁으로 우르르 몰려가 다시 한번 절을 올립니다. 그 다음엔 작은 아버지 집에서 소소하게 작은 제사를 올려야하죠. 작은 어머니 한 분이 돌아가셔서 그 어느 해보다 어머니의 부담이 커졌습니다. 설 전에 지낼 제사가 두 번, 설 이후에 지낼 제사가 세 번이라 각각 따로 제수를 마련하려면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타격이 큽니다. 일년에 최소 여덟번 이상 올리는 제사지만 특히 설전후엔 난리가 납니다.
어느 드라마나 인터넷 댓글에서 제사와 명절 때문에 스트레스인 주부가 많다는 기사에 여론몰이 하지 말라며 '요즘 누가 제사를 그렇게 지내냐'며 비아냥대는 분도 봤습니다만 여전히 제사를 그렇게 지내는 집은 많습니다. 일년 내내 제사음식을 물리도록 먹고도 주변 친지나 종친, 서원 행사까지 챙겨야하는 집안에선 냉동고에 떡이 얼려져 있는 경우가 흔하죠. 가끔 간식을 찾아 냉장고를 열었다가 수북히 쌓인 떡을 보고 질려서 냉장고 문을 도로 닫은 적도 있으니 어느 정도인지 아실 겁니다.
제사를 두고 인터넷이나 언론에서는 제사음식 재활용하기 내지는 칼로리 줄이기, 음식 가지수 줄이기 같은 '현명'한 주부의 팁을 많이 알려줍니다만 제사 음식을 해치워야할 처지가 수십년째 계속 되면 '맛있다'는 말은 안나오실 겁 니다. 아까워서 먹는 음식과 맛있어서 먹는 음식은 다르죠. 한때는 제사 비용이 전체 생활비(여긴 농촌이다 보니 직접 반찬거리를 만들면 식비가 생각 보다 적게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다 못해 넘쳐서 어머니가 오랜 세월 눈치껏 음식을 줄였지만 여전히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참 궁금했습니다. 제사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지만 왜 상에 간단한 음식만 놓고 대접하지 않고 산사람이 평소 먹지 않는 음식을 잔뜩 차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제사의 본래 의미만 놓고 보자면 정성스럽게 차린, 손수 만든 음식 약간 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습니다. 왜 많은 음식을 차리고 나눠 만들고 처분하기 위해 애써 '현명'해져야하는지 이해가지 않는 일이 때마다 반복되는게 신기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면 행운이 들어온다는 주술적 성격의 행위라면 동의하진 않아도 그런가보다 하는데 그런 것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산사람이 일년 내내 죽은 자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 일,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손녀에게 설거지를 시키면서 온전한 것은 아들을 먹이고 부스러기는 손녀들 먹으라고 해서 어머니를 속상하게 했던 일, 하루종일 허리가 굽도록 전을 부치는 어머니 곁에서 무전(무로 부친 전, 다른 지방엔 없죠?)이나 산적을 더 만들라며 한마디 보태다 어머니께 원망을 듣던 아버지. 집안 시끄러워지는게 싫어 어머니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했지만 명절 때 잠깐 얼굴을 내비치면서 수고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던 친척들(미안하긴 하겠죠). 무엇 보다 이 모든 불합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조선 시대에 종가나 장손이 제사를 크게 지내던 이유 중 하나는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형식이기도 했지만 가까운 친지들과 나눠먹자는 의미도 강했습니다. 종가집 며느리가 손이 커야 가난한 종친들에게 고기도 하나 더 싸주고 전이라도 더 퍼줄 수 있었으니 조상에 대한 예의를 차릴수록, 제사가 크면 클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으니 누가 이런 겉치례를 물려받으려 할까요? 정말 제사를 물려주고 싶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몸집을 줄여야한 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TV 드라마 속에서 큰 제사상에 잔뜩 음식을 차리고 한복입은 식구들이 모두 절을 하는 가족 판타지가 유행 했습니다. 지금도 뭐 대가족 판타지 드라마에서는 바글바글 모여서 절하는 그런 풍경이 클리셰처럼 등장하고 있구요. 그나마 다른 드라마에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런 제사가 제사의 모범인듯 제시되고 있습니다. 명절 특집, 설날 특집으로 방송되는 흔하디 흔한 오락 프로그램 만큼이나 이것도 정말 쉽게 변하지 않나 봅니다. 큰 제사가 있으면 허술한 제사도 있고 간단한 제사도 있어야 하는데 이런 건 왜 안될까요.
어머니는 올해도 명절 음식 뒷처리하기란 교양(?) 프로그램이 나오면 귀를 쫑긋하실 겁니다. 수십년 노하우에 어머니 보다 더 제사 음식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뭐 획기적인게 있나 싶어 한번 더 눈여겨보시겠죠. 솔직히 전은 바로 부쳤을 때 먹어야 좀 맛있고 지나고 나서는 어떻게 요리해도 별로더군요. 수육이나 두부전은 그나마 반찬거리라도 되겠지만 전은 답이 없을 겁니다. TV에서 '현명'한 살림의 지혜를 알려줄게 아니라 제사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알려 줬으면 좋겠어요.
반면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은 그런 TV 속 제사가 가끔 부러우신가 봅니다. 드라마 속 제사는 제기도 최고급이고 음식도 다양하죠. TV에서 워낙 제기 협찬이나 한복 협찬을 많이 받아 그런가 얼마전엔 눈여겨보던 작은 아버지가 TV에서 본 물푸레나무 제기를 한상자 사다주셨는데 제기 크기가 커서 음식을 더 마련해야할 거 같더군요. 어머니께 제사 전문가가 되란 뜻인가 싶어 저는 울컥했지만 어머니는 오래 걸려 제기에 층층이 쌓는 음식 단수를 줄였더니 이번에 다시 늘게 생겼다고 허허 웃으시더군요. 제사상이 보기 좋은 만큼 많이 올라가거든요.
여러분들은 올해 어떤 설날을 보내셨나요? 그리고 TV 속에서 어떤 설날을 보셨나요? 어제부터 계속 바빴던 어머니는 12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시간을 내서 TV를 보실 거 같습니다. 밥은 제대로 못 드셨는데 기름 냄새에 질려 음식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답니다. 짧은 휴식이 끝나면 또다른 가족의 방문을 준비하셔야겠죠. 설거지를 마치고 앉은 저도 덩달아 마음이 바쁩니다. 이왕이면 가족들을 만나 함께 하는 시간이 모두가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명절은 행복하자고 있는거니까 언젠가는 바뀔거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 명절에 어떤 일이 있었든 모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연휴가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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