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유나의 거리

'유나의 거리'가 재벌 드라마 보다 좋은 이유 셋

Shain 2014. 7. 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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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경 작가 하면 서민 드라마의 대표 작가고 '유나의 거리' 는 그런 작가의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난 드라마지만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어딘가 모르게 '오래됐다'는 느낌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요즘 사람들인데 그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나 감정은 어쩐지 80년대 사람들같다는 이런 말이죠. 극중 30세로 설정된 창만(이희준)이 부르는 '세월이 가면'같은 노래는 아무리 리메이크가 여러번 됐어도 80년대 대표곡입니다. 술에 취한 계팔(조희봉)이 부르는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그렇고 양순(오나라)의 '서울야곡'도 오래된 노래죠. 말이 안되는 설정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옛날 냄새가 난다는 뜻입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작가의 드라마 속 서울 서민들은 아주 조금만 변한 것 같습니다.

소매치기, 꽃뱀, 조폭이 주인공인 '유나의 거리'가 좋은 이유는?


김운경 작가는 77년 데뷰해 80, 90년대에 활약한 대표 서민 드라마 작가입니다. 다른 드라마 작가들이 트렌디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고 재벌 이야기로 시선을 잡을 때 김운경은 드라마 속에서 그 시대의 서민 정서를 그려냈습니다. '서울의 달(1994)'만 봐도 꽃뱀부터 제비족까지 밑바닥 사람들의 직업은 독특했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보통 사람들의 정서 만큼은 놀라웠죠. 그런 김운경 작가가 그 시대의 서민드라마 작가로 남지 못하고 21세기인 현재에도 여전히 유일한 서민 드라마 작가인 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서민 드라마를 탄생시키지 못한 공중파 방송사의 책임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바뀐 시대에 맞는 서민 드라마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TV는 새로운 서민드라마를 탄생시키지 못했습니다. 시청률에 절절 매는 속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심하죠. '유나의 거리'에도 각종 외제차나 비싼 음식점 PPL 장면이 자주 포함되고 있는 상황에서 돈도 안되고 화려하지도 않은 서민 드라마에 올인할 수 없는 제작사나 방송국의 처지를 이해못할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서민 드라마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대표 서민 드라마 작가인 김운경 작가가 공중파 아닌 종편에서 드라마를 제작했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시대에 뒤떨어진 '소매치기' 그래도 이 시대를 표현하기엔 무리가 없다.

 

아무튼 다소 뒤떨어진 시대적 묘사를 제외해도 '유나의 거리'는 좋은 드라마입니다. 등장인물이 소매치기든 꽃뱀이든 아니면 옛날에 날리던 전직 깡패나 노래방 주인이든 간에 주인공 창만을 통해 드러나는 정서 만큼은 이 시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따져보면 꽃뱀이나 소매치기가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직업'은 아니지만 이른바 '밑바닥'이라고 불리는 그런 일들이기 때문에 소매치기를 통해 더 잘 드러나는 시대상은 있습니다. 90년대의 김운경 작가가 제비족 홍식(한석규)을 주인공으로 시대를 관찰했던 것처럼 바닥식구 유나(김옥빈)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시대는 어떤 것일까요.


예전에도 한번 적은 적이 있지만 김운경 작가는 한겨례와의 인터뷰를 통해 악인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난 악인이 코믹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자기가 나쁜 걸 저토록 모를 수 있나, 좋은 소리 들을 수도 있는데 왜 그걸 못해서 저렇게 욕 먹고 살까. 뭘 몰라서 악한 거 같다"(출처 : 18년 만에 리메이크 되는 ‘서울 뚝배기’의 김운경 작가)는 작가의 말은 왜 '유나의 거리' 캐릭터가 정감이 가는지 그 답을 알려줍니다. '유나의 거리'가 재벌 드라마 보다 좋은 첫번째 이유는 깡패, 소매치기, 꽃뱀같은 '나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약게 사는 것같지만 따져보면 제자리

 

솔직히 극중 유나나 남수(강신효)가 남의 지갑을 빼내는 장면은 영 달갑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꽃뱀은 결코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남이 어렵게 모은 돈을 뺏어 사무실을 꾸리고 '회사'를 만들고 '깝지'같은 자기들만의 은어로 대화하는 유나 패거리는 힘들게 일하는 것 보다는 남의 지갑을 뺐는게 더 쉬워서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물론 남수같은 캐릭터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서 할 짓이 없어 '바닥식구'가 되었다는 설정이긴 합니다만 선배 소매치기들을 이간질하며 거금을 빼내는 화숙(류혜린)처럼 그들도 쉽게 한재산 벌어보려고 그렇게 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같은 여성 혐오의 시대에 유부남에게 한재산 뜯어내는 미선(서유정)은 비호감 중의 비호감입니다. 평생 같이 고생한 아내를 두고 중년의 외로움 운운하며 바람피는 정사장(윤다훈)이야 당해도 싼 남자입니다만 그의 외도로 눈물짓고 뒷수습하러 쫓아다니는 부인을 생각하면 절대 못할 일이죠. 미선은 정사장같은 찌질남이 싫다면서도 능숙하게 정사장을 요리합니다. 정관수술했다는 정사장의 아이를 임신했다고도 하고 '까르니에 발롱블루 핑크골드'라는 이천만원 짜리 시계를 얻어내기도 하는 미선의 실력(?)은 놀랍기만 하죠. '나쁜 짓도 법에 걸리는게 있고 안 걸리는게 있다'는 미선의 말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약아빠지게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만 자기들도 결국 이용당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악착같이 남을 뜯어낸 그들은 하나같이 큰 부자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소매치기로 잘 나가던 남수는 손을 다치자 이백만원도 구하기 힘든 신세가 됐고 유나도 돈이 없습니다. 깡순(라미란)이라는 그들의 동료는 남의 지갑을 털다 잡혀갑니다. 어렵게 번 돈을 쉽게 뺐겨줄 세상도 아니고 그렇게 벌어봤자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지듯 돈도 쉽게 빠져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싫은 남자들 상대하면서 돈을 번 미선이 호스트바에서 만난 젊은 민규(김민기)에게 돈을 펑펑 쓰고 신경쓰고 좋아하는 모습은 정사장이 미선에게 빠져든 모습과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순진해 보이던 민규 역시 미선의 돈을 노린 제비일 가능성이 높겠죠.전직 형사반장이자 노래방 주인인 봉달호(안내상)이나 조폭이었다가 이제는 콜라텍 사장이 된 만복(이문식). 봉달호는 소매치기였던 아내가 다시 범행을 저지를까 닥달하면서도 노래방 도우미로 양순이 들어가게 하고 자살한 세입자의 유족에게 방세를 받아낸 홍여사(김희정)와 만복은 깍쟁이같지만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에 돈을 쓰곤 합니다. 만복은 깡패 시절 형님이던 쌍도끼(정종준)를 군식구로 모시고 누구에게나 미움받는 처남 계팔도 데리고 삽니다. '유나의 거리'가 좋은 두번째 이유는 이렇게 약아빠진 것같으면서도 빈틈많은 보통 사람들을 잘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깍쟁이같으면서 빈틈많은 보통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만복의 집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들 중 유일하게 창만 만은 그들과 다른 것같기도 합니다. 학교는 제대로 나온 적이 없지만 이것저것 주어들은 것은 많아 대학생 다영(신소율) 보다도 아는게 많고 전기면 전기 미장이면 미장 못하는게 없는데다 남의 돈 뺐는 유나를 말리는 바른생활 사나이 창만. 손해보는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챙기고 빈털터리가 되어서도 가게 놔두고 도망간 가게 주인을 기다리는 이 순박한 남자. 이용해먹기 좋고 만만하게 보이는 이 남자는 만복에게도 호구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싸구려 검은 양복을 입고 만복의 집안일까지 거드는 신세가 영 말이 아니었죠.그런데 그 어떤 상황에도 인정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뚝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됩니다. 닳고 닳아 약아빠진 척 하면서도 만복의 집 세입자들은 어느새인가 창만에게 의지하고 젊은 여자들은 창만에게 빠져듭니다. 낡은 다가구 주택에 세들어 사는 그 사람들은 조금 만 더 벌어보겠다고 악다구니하고 다투면서도 속으로는 창만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더욱 의지하는 겁니다. 버려진 길고양이같이 사람들을 경계하고 마구 할퀴던 유나가 어느새 창만에게 마음을 준 것처럼 말입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창만의 관점은 '유나의 거리'가 다른 어떤 재벌 드라마 보다 좋은 세번째 이유입니다.

 

거친 이 세상에서 유나가 창만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현대 사회는 사람의 가치가 점점 더 하찮아지는 시대라고들 합니다. 사람 목숨 보다 내 손 안의 돈이 더 중요해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창만같은 따뜻한 사람이 스펙 좋고 가진 것 많은 사람들에게 밀리고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도구처럼 이용하려는 이 시대. 그런 시대에 공중파 TV 속에서 시대상을 표현하는 서민 드라마가 사라졌다는 것은 생각 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각박하다 못해 냉정한, 우리 시대의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유나의 거리'처럼 드라마의 시선을 사람들에게 맞춘 드라마가 더욱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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