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 중 '폼생폼사'가 고사성어냐고 묻는 질문을 보고 잠깐 어이없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뜻의 이 유행어가 의외로 꽤 오래된 말이더군요.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면 77년에 이미 '폼생폼사'란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이후 90년대 초반에 다시 유행하기 시작해 90년대 후반 젝스키스가 부른 노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폼난다' 혹은 '폼잡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남들 보다 멋지게 살고 싶다는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있는 말입니다. 때로는 실속도 없으면서 잘난체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뭘 좀 해보려고 자세를 취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으쓱거리고 뽐낸다는 뜻도 있습니다.


'폼생폼사' 캐릭터는 찾아보기 힘든 '유나의 거리'


그래서 그런지 TV 드라마에는 유난히 '폼나는' 캐릭터들이 참 많죠. 사법고시 패스에 돈 일억 쯤 우스운 젊은 남자도 있고 뭘 해도 멋있고 잘 생긴 재벌 2세도 있고 밑바닥 깡패인데도 눈빛 하나에 간절함이 서려있고 연인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그런 폼나는 캐릭터들 말입니다. 캐릭터 자체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멋있는데 감정과잉의 연기와 슬픔이 뚝뚝 흐르는 눈빛까지 더해지면 '에이 저런 사람이 어딨어?'하는 마음으로 시큰둥하게 보던 시청자도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런 '폼생폼사' 캐릭터를 보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 자잘한 재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유나의 거리'에는 폼나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먼 주인공들만 잔뜩 등장합니다. 지금은 유나(김옥빈)와 다영(신소율)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고 한만복(이문식)네 사람들이 모두 다 믿고 의지하는 창만(이희준)도 처음에는 유나에게 오천원만 빌려달라고 했던 꾀죄죄한 남자였습니다. 다른 조폭 영화에서는 깡패도 멋있기만 하던데 전직 조폭이던 만복은 마누라에게 싫은 소리 듣고 딸에게 절절 매는 소심한 남자입니다. 만복 혼자서는 후배들을 감당하지 못해 치아도 시원치 않은, 등에 산토끼 문신이 그려진 장노인(정종준)이 후배를 단속할 정도입니다.










외국 영화에서는 늙은 마피아 두목이 품위있는 모습으로 가족들과 식사를 합니다만 장노인은 만복에게 구박받으며 구청에서 나오는 돈으로 밥이나 먹고 사는 처지고 늦게 알게 된 유일한 낙은 콜라텍에서 할머니들과 춤 한번 추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젊으나 늙으나 멋지고 폼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일거리가 없어서 며칠씩 쉬어야하는 칠복(김영웅)은 벌금을 낼 돈이 없어 아내 혜숙(김은수)에게 구치소에 다녀오라고 권해야할 정도입니다. 다세대 주택에서 가장 젊은 편인 대학생 다영도 연극을 하긴 하지만 폼잡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죠.


계팔(조희봉)을 보면 이건 뭐 폼은 커녕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나 홍여사(김희정)에게 얹혀 살며 개를 키우는 '개삼촌' 계팔은 가짜 비아그라 판매로 칠복의 아내 혜숙을 경찰에 잡혀가게 만든 당사자입니다. 생각이 얕고 단순해서 비아그라 사건 이전에도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쳤는지 매형인 만복도 계팔을 믿지 않고 홍여사도 계팔을 안타까워 합니다. 몸으로 벌금을 떼워보겠다며 '빵'에 들어갔는데 축구하다가 허리를 삐끗해 돌아온 계팔은 차마 집에는 못 알리고 공원에서 잠을 잡니다. 아무리 미선(서유정)에게 잘 보이려 해도 잘 보일 구석이 손톱 만큼도 없는 남자죠.


폼나기는 커녕 찌질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주는 매력.


콜라텍 지배인에 부킹매니저에, 전직 경찰, 소매치기, 꽃뱀, 건달까지 - 직업(?)은 특이하지만 사는 모습 만큼은 찌질하고 평범한 이 사람들. 남수(강신효)와 창만이 유나를 사이에 두고 치졸한 신경전을 펼칠 때는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아서 많이 웃었네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갖은 폼을 다 잡고 잘 보이려 하다가 행여 다른 남자에게 뺐길 거 같다 싶으면 순식간에 유치하게 변하는 그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멋진 외모로 눈에 힘을 주고 있으면 한번쯤은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유나의 거리' 주인공들은 그런 긴장감이 필요없습니다. 찌질한데 매력있는 이 느낌 참 괜찮더라구요.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내 옆지기나 친구가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폼나는 사람이 아니라도 정겹고 소중한 것처럼 TV나 미디어에서도 사람의 가치를 좀 더 귀하게 다뤄주었으면 싶을 때가 많죠. '서민 드라마'라는 게 별개 아닙니다. 창만이가 가장 걱정하는 유나, 아웅다웅 살아가는 다세대 주택의 한 사람이면서 여전히 소매치기를 끊지 못한 유나의 삶이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 모습 조차 가끔씩 엇나가는 우리 삶의 선택은 아닐지 연민의 눈으로 지켜보게 되네요. 물론 도둑질해서 번 돈으로 잘 살 리도 없고 훔치는 행위 자체는 전혀 옹호 불가능합니다만 워낙 주변 이야기가 따뜻하니 유나 조차 그런 시선으로 보게 된다는 이야기죠.


도시의 야생동물같은 유나. 창만을 위해서라도 좋게 끝나야할텐데.


모녀 절도단(알고 보면 모녀는 아니지만)의 집으로 다이아몬드를 훔치러 간 유나와 윤지(하은설). 유나가 찜질방에서 만난 그 어린 여자아이의 꿈까지 꾸면서 그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건 소매치기로서의 자존심일까요? 아니면 어린 시절 때문일까요? 미선에게 자부심 운운한 걸로 봐서는 자신의 목표물을 털렸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함께 일을 시작한 윤지가 너무나 전문적인 느낌이 나서 위험해 보입니다. 지갑은 털어도 절도나 강도는 안한다는 유나가 왜 이러는지 모쪼록 창만을 위해서라도 잘 정리되어야할텐데 싶은 마음. 화려한 도시의 야생동물같은 유나 캐릭터에 정감이 가는 걸 보면 이 드라마의 저력이 참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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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7.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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