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사극 만큼이나 시대극을 참 좋아합니다. 장편 드라마 특유의 서사는 현대극 만으로 소화할 수 없거니와 TV에서 쉽게 보기 힘든 시대적 상황을 묘사해서 얻을 수 있는 볼거리도 꽤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극이나 시대극은 주인공들의 관계를 부각하기 위한 극적 장치거나 코스프레 수준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죠. 시대상을 완벽히 구현하는, 소품이나 배경의 고증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드라마 속에 보이는 시대가 그 시대같다는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드라마 '매드맨(2007)'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도 TV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의 드라마는 그런 드라마를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죠. TV 드라마가 한시적인 소모성 컨텐츠로 제작되는 것도 한 원인입니다.


배경인 80년대를 강조할수록 손해보는 드라마 '끝없는 사랑'.


SBS '끝없는 사랑'은 등장인물이 꽤 흥미로운 드라마이고 시대극이지만 아쉽게도 시대적 배경은 큰 의미를 두기 힘든 드라마더군요. 군데군데 배치한 오래된 소품에도 불구하고 시대극이란 인상을 받지 못했고 대부분의 인물관계나 사건이 픽션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를 본 첫인상은 과거 '야망의 세월(1990)'으로 큰 재미를 봤던 나연숙 작가가 뼈대가 비슷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두번째 인상은 이 드라마는 시대극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었습니다. 황정음이란 배우도 류수영도 정경호나 차인표, 심혜진 모두 다 좋아하는 배우지만 '시대극'으로서는 최하점이더군요.


세부적인 면을 하나씩 따지면 섬세하게 80년대를 짚어낸 곳도 있는데 전반적으론 제작능력 부족입니다. 85년쯤 자율버스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진 버스 안내양이나 군대 의문사같은 소재는 잘 꺼냈는데 전체 비율로 봐선 고증이 엉망이고 사건과 캐릭터와 시대가 따로 놀고 있습니다. 버스와 TV와 자동차는 오래전 그 물건이란 시대감이 물씬 느껴지는데 인물과 사건에는 시대가 느껴지지 않더군요. 사실 나연숙 작가의 '야망의 세월'이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도 드라마와 시대적 배경이 잘 어우러지지 못하고 특정인물의 성공 만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소품 몇개를 나열하고 사건을 인용한다고 해서 인물이나 드라마에서 시대적 느낌이 풍기는 건 아니니까요.







조성모가 부른 OST는 귀에 익은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Grandfather's Clock)'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더군요. 오래 동안 함께 했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이 노래는 마치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듯 느껴지지만 드라마는 향수어린 과거 보다는 현대의 거리를 보고 있는 느낌을 풍깁니다. 이건 배우의 탓이라고 보기엔 배우는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는 것같은데 뭔가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든 이질감이 있습니다. 극중 캐릭터가 80년대에 살았을 법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인물이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나열하는 사건이 너무 많아서 디테일을 살리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당한 캐릭터에게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점은 아쉽습니다. 과거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고문을 이겨내고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들을 보면 존경심이 생겨나더군요. 故 김근태 의원같은 인물을 보면 딱히 강압적인 성격도 아니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는 편임에도 거부할 수 없는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꽤 오래 고생했다고 하죠. 사람은 어린 나이에 고문을 당하면 인격이 달라질 정도로 변한다고 합니다. 소위 '양심수'라 불리던 정치적 희생자들은 겉으로는 기쁘게 웃고 있지만 종종 뼈속 깊이 숨길 수 없는 고통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제강점기는 멀리 있기 때문에 잊어버린 사람이 많지만 가까운, 80년대의 그림자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픈 80년대를 드라마로 묘사하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물론 이 모든 아쉬움은 제가 기대하는 것은 '아픈' 80년대가 잘 드러난 시대극인데 제작자가 만들고 싶은 것은 시대적 배경을 소품으로 삼은 극적인 '멜로'라는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강압적인 시대 분위기는 한 형제의 독한 사랑을 받는 여주인공 서인애(황정음)는 운명을 강조하기에 딱 알맞은 장치입니다. 현대극에서는 쥐도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을 수 있고 법보다는 주먹이 설치는 무법지대를 구현할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하루 아침에 운명이 바뀌는 설정은 무리이기 때문에 80년대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소년원에 가고 영화배우, 검사로 성공한다는 여주인공이 좀 신기하기는 하네요.


가장 신경쓰이는 부분은 이 드라마에 실존인물이 떠오르는 여러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인데요. 김건표(정동환) 총리 아내 민혜린(심혜진)에게 죽었다는 인애의 어머니 경화(임주은)는 아마도 정인숙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한복 디자인 운운하며 영부인에게 들락거리는 진양자(최지나)나 천태웅(차인표), 박영태(정웅인), 비서실장 심씨의 역할도 모티브가 있죠. 그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 하나하나에는 역사적 기록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망의 세월'이 특정인물 미화로 변질되어 버렸듯 역사를 컨텐츠의 소재로 삼은 이 드라마 역시 의도치않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시대를 강조할수록 어긋나는 느낌. 멜로에만 집중하는 것이 나을지도.


'끝없는 사랑'의 시청률이 점점 더 떨어지니까 이번에는 황정음의 선택이 틀린 거 아니냔 말도 나오고 개인적으론 SBS는 역시 사극, 시대극을 만들면 안되는구나 싶습니다. 간만에 보는 최성국도 반갑고 황정음, 류수영, 정경호를 비롯한 연기자들에게는 별로 불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시대적 상황을 묘사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정말 이 드라마를 살리고 싶다면 시대적 소재를 부각시키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가 워낙 무거운 시대다 보니 멜로를 살리려면 잘못 선택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어설프게 시대를 묘사했다간 최악의 드라마가 될 것같네요. 두 형제와 한 여자의 지독한 사랑을 그려낸 드라마 - 배우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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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1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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