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공포의 삼겹살' 혹은 '날으는 돈까스'라는 유행어를 한번쯤 들어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별명이려니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곰, 멧돼지 등으로 불리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별명입니다. 가장 오래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인물로 한때 권력의 실세였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져 미국으로 망명했고 국외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김형욱은 79년 프랑스에서 실종되어 생사가 묘연했는데 김재규의 명령으로 죽었고 시신이 산산조각나 찾을 수 없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지금 '끝없는 사랑'에서 빅베어(박요한)의 역할 모델이 바로 김형욱입니다. 79년에 죽은 사람인데 하고 생각해보니 김형욱의 공식 사망신고가 84년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끝없는 사랑'의 실존 모델들.


드라마 '끝없는 사랑'은 이렇게 군데군데 오래된 시대의 흔적들이 넘쳐납니다. 역사적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었으니까 볼 때 마다 실존인물이 떠오릅니다. 천태웅(차인표) 장군이 각하라 부르는 인물은 전두환이고 점잖으면서도 열의 넘치는 천태웅의 역할 모델은 노태우고, 천태웅과 차기 대통령 자리를 겨루는 김건표(정동환)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 제3공화국에서 서인애(황정음)의 엄마를 죽인 박영태(정웅인)는 장세동 내지는 그 비슷한 위치의 정보부 인물입니다. 뭐 차광철(정경호)같은 인물은 빠찡꼬 사건의 정덕진, 한광훈(류수영)은 아직 포지션이 애매하지만 '리틀 프레지던트' 박철언, 서인애는 후에 빠찡코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로 예상됩니다. 그 시대의 사건이야 뻔하니까요.


이것 말고도 실존인물과 비슷한 등장인물은 넘쳐납니다. 마지막 수업에서 '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법학 강의는 무의미하다'는 발언을 했던 드라마속 유기훈 교수는 71년 미국으로 망명한 유기천 교수입니다. 총리의 숨겨진 딸로 묘사되는 서인애의 엄마는 고위직 정치인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정인숙을 모티브로 한 인물일테고 일본으로 망명한 허실장은 한때 5공화국에서 권력을 다투다 망명한 '3허' 중 한명인 허문도 실장이겠죠. 한광철이 언급한, '청와대 넘버원 친동생'이란 인물은 정덕진의 동생 정덕일과 친했다는 전경환일 것입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역사 속 실존인물들. 너무나 당연한 현상.


제가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시대성 고증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 시대의 볼거리가 흥미진진해서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황정음, 정경호, 류수영을 비롯한 배우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연숙 작가가 80년대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허실장과 천태웅이 마치 성경처럼 받드는 '각하'가 우리에게 그렇게 친근한 존재였던가요? 수류탄을 끌어안고 죽은 강재구 소령의 아버지를 만나는 천태웅 장군은 노태우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것이지만 노태우의 '인품'과 '공적'은 518 없이는 절대 언급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실존인물들의 좋은 점만 캐릭터로 살리는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몇몇 시청자들은 말합니다. 이 드라마를 볼 때 마다 전두환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노라고. 지독한 사랑에 빠져 갈등하는 주인공 남녀들 뒤로 숨은 전두환. 서인애가 소년원에 들어가고 권력 실세의 부인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지하실에서 고문받게 만드는 권력의 총책임자. 보안사령관과 총리가 경쟁하게 만든 바로 그 사람. 80년대의 사랑이라는 테마 앞에 그 무거웠던 권력은 이렇게 숨어도 되는 것일까요? 물론 80년대에도 서로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시간은 흘렀습니다. 그러나, 나연숙 작가가 시대를 보는 방식은 여전히 너무 겉돌고 있거나 가볍습니다. 그 부분이 보는 내내 거슬릴 수 밖에요. 








'야망의 세월' 드라마와 실존인물이 너무 다르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1990)'은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해서 유명세를 탔습니다. 몇몇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꽤 오랫동안 기억된 명장면으로 거론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극중 박형섭(유인촌)이 태국에서 폭도들의 위협과 맞서는 장면입니다. 후에 박형섭의 아내가 되는 여직원 임우희(전인화)와 함께 단둘이 금고를 감싸안고 지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주인공 캐릭터의 대담함과 배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으로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이를 실제 이명박 전대통령의 일화로 기사화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을 현대건설에 기용한 것으로 알려진 故정주영 회장은 이 장면을 두고 다른 말을 합니다.


“이명박씨는 내가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가 그 분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작가의 장난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명박씨가 소양강 댐이다 뭐다 해서 다 한 것처럼 나오고 박대통령앞에 가서 으르렁으르렁거린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소양강 댐 만들 때 이명박씨는 간부도 아니었고 참여도 하지 않았다. 설계에서부터 설계 시공에 이르기까지 전부 서울공대 패거리들이 했다. 모두 이씨의 선배들이다.

  현대건설이 65년에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들이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칼을 든 폭도들이  금고를 열라고 요구했으나 이명박씨 혼자 끝까지 금고를 지킨 무용담이 있는데 이씨는 사실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 중의 한명일 뿐이었다. 현대건설은 생긴 지가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현대건설 초반기에 맡았던 공사에 그분이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분이 사장 이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한 10년쯤이나 될까말까이다.



  물론 이명박씨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지만 드라마상으로는 조선소 건설이나 자동차 등등 다 그 분이 한 것처럼 나오니까 사내에 보이지 않는 위화감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분이 여러가지로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 나는 밑의 직원이 매스컴에 나오면 그걸 좋게 보지만 같은 동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 때 저 밑에서 서류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다 한 걸로 나오고, 그건 좋은데 중동건설도 다 자기가 한 것처럼 나오니, 그 때 이명박씨는 참가할 자격도 못 됐다. 서울대 선배들이 다 한 건데 서로 말은 못해도 회사 내에서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그 분이 떠날 분위기를 자초한 거다. 


출처 : 독점연재 - 鄭周永 정치에 건다 (시사저널 1992년 4월 23일)


물론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현실과 아예 동떨어진 가상의 판타지 드라마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실존인물의 이름을 쓰는 것도 아니고 창작이니까 둘러대려면 핑계도 충분하죠. 그런데 우리 나라는 드라마와 현실의 관계가 처음부터 잘못 정립되어 그 악영향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정통 시대극이나 정통 사극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요즘은 아예 고증의 어려움, 자본의 한계를 핑계로 정통 시대극을 포기하는게 당연히 여겨지는 추세구요. 수많은 정통 시대극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판타지가 만들어지는 건 괜찮은데 정통 시대극도 없는데 판타지만 난무하니까 실존인물 이미지와 드라마 캐릭터가 혼동될 수 밖에요.


이 두 사람의 캐릭터 이렇게 묘사되어도 좋은 걸까?


무섭고 진지한 얼굴로 '이 시대의 권력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제 알게 되겠지'라며 서빙고 호텔의 고문과 협박, 조작, 회유을 언급하고 '자신의 손으로 역사를 쓰려는 자들이 있다. 그래선 안되지'라며 한광훈에게 유학을 다녀오라 지시하는 천태웅 장군. 일본에 망명한 허실장을 처리하며 '각하 심정을 이제 알겠지'라며 '비서 실장의 배신에 가슴을 쓸어내렸을 거'라는 천태웅은 전두환에게 충성하며 후계자가 된 노태우가 떠오르지만 실존인물 보다 훨씬 훌룡한 캐릭터입니다. 국가에 대한 그의 고민이 조금 멋져 보이기도 하죠. 518을 등에 업고 권력을 쥔 노태우에게 가당키나 한 연출일까요?


한 사람의 인간에게는 좋은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습니다. 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거기다 노태우의 경우 김영삼에게 권력을 넘겨준 정치적 의미를 재평가하자는 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무서운 것은 그런 인간 노태우의 업적 보다는 역사적 과오가 훨씬 무겁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 없는 결혼을 허락하고 시대적 변화에 운명을 맡기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얼핏 매력적이면서도 순간순간 마음이 불편한건 이 드라마의 바탕이 잊어버릴래야 잊을 수 없는 80년대이기 때문이죠. 가상의 인물을 보면 역사가 떠오르는데 드라마는 역사가 아니라니 이 무슨 코미디인가요. 캐릭터도 사실에서 탄생했어야하는 것 아닐까요?


사랑이야기를 둘러싼 작가의 시대인식 문제 있다.


그나마 '끝없는 사랑'이 다행인 것은 '야망의 세월'이 제작되었던 시대와는 달리 천태웅은 영웅이 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 덕에 주변인물들이 역사에서 탄생했다는 걸 잊는 분들이 많다는 점일까요?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가상의 캐릭터가 다른 시대극에도 많았지만 다른 작가들의 가상인물들과는 달리 유난히 나연숙 작가의 캐릭터는 불편한 부분이 많습니다. 역사의 재해석도 아니면서 실존인물과 너무 다른 캐릭터를 묘사해서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주연 배우들 때문에 계속 시청은 할 거 같습니다만 역사를 좀 더 디테일하게 꼼꼼하게 봐도 모자란 시대에 이런 선택은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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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모노
    2014.08.02 23:18

    제가 생각한것과 주인장님이 먹먹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내용이 상당히 공감됐습니다.

  2. 알라깔라
    2014.08.04 12:00

    어느정도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극의 진행상 천태웅장군이 영웅이 되기보다는 권력에 의해 추락할 가능성이 있기에 지금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려합니다. 한광훈이라는 캐릭터의 마지막이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3. 영단어
    2014.09.06 23:50

    "아쉽습니다" 끝 매듭
    캬~ 썰전클라스로 참 쓰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