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피노키오

피노키오, 기재명의 '사실'과 기재명의 '진실'은 어떻게 다를까?

Shain 2014. 12. 1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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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물처리장에서 화재를 일으키고 소방대원 9명을 순직하게 했으면서도 소방대장 기호상(정인기)에게 누명을 씌우고 살아온 세 사람. '피노키오'의 기재명(윤균상)은 그 셋 중 한명인 문덕수(염동헌)를 유인해 함정에 빠트리고 문덕수가 떨어진 곳을 벽돌로 막아버린다.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나머지 두 사람의 시신에선 부검결과 독극물이 발견되었고 두 사람과 채무관계가 있던 문덕수는 두 명의 동료를 죽이고 도망친 용의자가 된다. 기재명은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여버린 거짓말쟁이들과 언론에 증오를 품고 있고 드라마의 흐름상 기재명이 셋을 모두 죽였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그러나 시청자들 중에는 기재명이 둘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고 문덕수는 구덩이에 빠졌을 뿐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기재명은 과연 폐기물처리장 직원들을 모두 죽였을까? 최달포에게 복수의 뜻을 내비치고 있는 기재명.


기재명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문덕수 패거리를 죽인 살인마일까? 아니면 공장직원 두 사람을 죽인 것은 진짜 문덕수일까? 문덕수는 아직도 구덩이에 살아 있을까? 기재명이 김밥 할머니에게 매일 사간다는 김밥은 혹시 문덕수의 밥이 아닐까? 생전 처음 본 아이를 동생 하명이라 착각해 목숨걸고 구해줬던 기재명 - 그들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기재명의 속사정에 기재명의 무죄를 믿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부분은 마찬가지다. 언론에 의해 희생된 기재명이 끔찍한 살인마가 되어 죄값을 받는다면 너무나 억울할 것이고 최달포(이종석)도 최인하(박신혜)와의 해피엔딩은 힘들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죽음이 반전을 위해 기획한 눈속임인지 진짜 살인인지는 두고 보더라도 일단 기재명에게 자신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숨긴 최달포의 사명은 기재명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수습기자 최달포가 기재명의 '진실'에 접근해 가는 모습은 아마도 진실이 아닌 뉴스거리를 추구하는 언론에 대한 반성이자 최달포가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재명이 살인마라는 쪽에 무게를 두는 이유 중 하나도 최인하가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엄마 송차옥(진경)이 최달포 가족을 비극으로 몰고간 당사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최달포에게도 친형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비슷한 과정이 있으리란 추측 때문이다. 기재명의 본심을 두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될 지도 모른다.










최인하는 김공주(김광규)에게 혼났을 때 드러났듯 언론의 공익성과 시청자의 알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신참이다. 최달포 역시 헬스장 사망 사건 이면에 숨겨진 한 아주머니의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렇게 기자로서 아직 모자란 두 사람의 수습기자에게 가족이 무엇 보다 중요한 까닭은 '사실'과 '진실'의 차이 때문이다. 박혜련 작가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2013)'에서 묘사했던 대로 '사실'과 '진실'은 가끔 큰 차이가 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무리하게 살을 빼려다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주머니가 병에 걸린 딸을 위해 목숨 걸고 다이어트를 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아버지와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위해 복수를 결심한 기재명이 폐기물처리장 직원 셋을 죽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가족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송차옥과 기자들이 뻔뻔하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댈 때 분노했던 기재명의 마음은 '진실'이다. 복수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이유 조차 없는 절망 - 시청자들이 기재명이 진짜 살인마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근간에는 그가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을지 공감하기 때문이다. 기재명의 진실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무죄를 바라는 것이다. 최달포가 형의 뒤를 캐며 직접 마주쳐야할 진실도 바로 그것이다. 동생이라면 이런 처절한 진실을 두고 살인이라는 사실만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최달포는 형을 둘러싼 사실과 진실을 동시에 뒤쫓아야한다.


기자가 대중에게 전달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송차옥은 기재명이 목숨걸고 한 아이를 구한 '사실'을 전달하며 기재명을 한순간의 정의의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직접 잘못된 보도로 기재명의 가정을 붕괴시켰지만 누명쓴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는 기재명을 고아가 된 불쌍한 영웅으로 되어버렸다. 복수를 원하는 피해자라는 진실은 철저히 가려진다. 카메라 기자 이주호(윤서현)의 우려대로 기재명은 얼마든지 복수할 뜻이 있고 과거 송차옥을 원망하다 폭력사건으로 경찰서에 구류된 적이 있지만 방송인 송차옥에게 중요한 것은 기재명이 한 아이를 구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송차옥은 늘 '사실'을 감정적으로 이용해 뉴스를 만들어왔다. 피노키오 목격자의 증언과 문덕수의 주장 만으로 평소 동네 주민들과 소방대원들의 존경을 받아온 기호상을 동료들을 희생시킨 살인자로 만들어버렸다. 목격자의 증언이란 '사실'이 있기에 더 이상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찾아온 어린 기재명이 아버지의 진실을 호소하는 인터뷰를 외면하고 기재명이 자신에게 흉기를 들이댔다는 사실 만으로 경찰서에 넘겨버렸다. 자신의 악행을 비난하는 딸과 기재명에게 송차옥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내가 보도한 뉴스가 '사실'이 아니었던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느냐고. 한번도 '사실'을 조작한 적이 없기에 떳떳하다고 말이다.


최인하가 마주친 엄마 송차옥의 잔인한 진실.


기재명의 복수를 걱정하는 이주호는 최인하에게 기재명과 송차옥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기재명이 최인하에게 복수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최인하는 충격을 받은 가운데 인터뷰 화면에서 한짝의 운동화를 발견했고 그 운동화가 최달포 운동화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할아버지 최공필(변희봉)이 달포를 바다에서 구해낼 때 신고 있던 바로 그 운동화였던 것이다. 엄마가 기재명의 가해자라는 사실 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최달포가 기재명의 동생 기하명이라는 진실이었다. 인하는 왜 최달포가 가끔씩 인하에게 화를 내고 분노했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뜬금없지만 생각해본다. 기자가 사실 만을 이용해 특종을 터트리는 건 생각 보다 쉽지만 기자가 '사실' 이면에 숨은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인하가 한짝의 운동화를 보고 최달포의 과거를 눈치채고 최달포가 기재명과 문덕수의 통화내역을 보고 복수하고 싶은 형의 진심을 읽어내고 최공필이 바보 노릇하는 최달포를 보고 자신을 보살피고 싶어하는 따뜻한 마음을 읽고 최달평(신정근)이 달포가 좋은 놈이라는 걸 내심 인정하는 것처럼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생각 보다 진실은 가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기자의 책임감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사건에 대한 관심 보다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진실'은 MSC가 만들어낸 기재명의 영웅극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최달포가 숨겨온 진실을 알게 된 인하. 결국 기자가 진실을 추구하는 힘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아닐까.


사실의 이면을 까면 또다른 사실이 나오고 결국엔 '진실'이 드러난다. 최인하에게도 자신이 직접 마주쳐야할 송차옥의 진실이 있을 것이고 최달포에게도 자신이 직접 찾아내야할 기재명의 진실이 있다. 일부 시청자들의 안타까운 마음대로 기재명은 아무 죄없는 문덕수의 가족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주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 복수를 꿈꾸는 순간에도 아이를 구한 기재명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겠지. 과연 기재명의 복수는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에 대한 경각심일까 아니면 문덕수를 비롯한 과거의 가해자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는 것일까. 기재명의 살인 의혹이 시청자의 뻔한 동정심이 될지 양파껍질같은 진실을 숨기고 있을지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최인하와 최달포가 기재명의 진실을 간파하는 애정이 어쩌면 '피노키오'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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