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한국 드라마 보기

펀치, 법조계의 권력을 선택한 박정환의 쓸쓸한 뒷모습

Shain 2014. 12. 17. 12:22
728x90
반응형

박경수 작가의 '황금의 제국(2013)'은 뻔한 멜로나 화려한 연출없이 최고의 긴장감을 끌어낸 드라마였다. 특히 재벌 가족 간의 암투를 묘사한 끝부분에서는 모든 사건이 등장인물의 집이나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그 흔한 야외촬영도 몇번 없었는데 극단적으로 이그러지는 캐릭터 간의 갈등 만으로 볼거리가 충분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경제를 뒤흔들었던 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죽고 재벌의 아내였던 여자는 목숨 보다 소중한 아들을 잃고 치매에 걸렸으며 재벌총수의 동생과 장남, 조카는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재벌의 딸로 태어나 남편도 가족도 모두 버린 여주인공은 홀로 남아 재산을 지키게 된다. 대한민국 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국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들에 재벌가의 재산싸움이 엮여 있다는 엄청난 진실. '황금의 제국' 보다 무서운 경제 드라마는 흔치 않다.


자신의 생명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된 검사 박정환. 그는 언제 자신의 이상과 꿈을 버렸을까.


이번주부터 방송되기 시작한 '펀치'는 한 남자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 법조계를 쥐락펴락하는 검찰총장 이태준(조재현)의 오른팔이자 한 아이의 아빠이고 세탁소집의 장남인 검사 박정환(김래원)은 건강진단 결과 악성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앞으로 6개월 밖에 남지 않은 그의 시한부 생명 - 이대로는 검찰총장으로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미래는 커녕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의 모습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작스런 죽음을 알게 되면 자신이 곧 죽는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박정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남들이 다 원하는 쉽고 곧은 길도 있고 어쩐지 가고 싶지 않은 좁고 어두운 뒷길도 있다. 곧은 길을 가도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나올 수 있고 뒷길을 가도 남들 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많은 선택의 순간을 놓고 사람들은 후회를 하고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환은 이태준의 성공을 위해 많은 뒷길을 선택했다. 이태준과 함께 하면 미래가 밝을 것이라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이태준의 형 이태섭(이기영)의 뒤치닥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환은 살고 싶은 마음에 또 한번 선택을 한다. 자신의 뇌종양을 수술할 수 있는 장민석(장현성)을 빼내기 위해 전처인 하경(김아중)의 도움을 받았지만 하경과의 약속을 어겼고 또 한번 이태준의 편을 들어준다. 하경은 급발진 사고에도목숨걸고 딸 예린(김지영)을 구해준 운전사를 돕고 급발진 사고의 원인인 세진자동차의 비리를 드러내고 싶었지만 박정환의 배신으로 실패하게 된다. 환자 박정환은 자신이 선택해온 길이 계속되리라 믿고 싶어한다. 수술 성공률도 낮고 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악성뇌종양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거침없이 돌파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대로 모든게 이뤄진다면 그게 어디 인생일까. 악성뇌종양은 끝끝내 박정환의 발목을 잡을 모양이다. 박정환은 자신의 삶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리라. 그리고 지금까지 선택해왔던 삶을 뒤돌아봐야하리라. 원래 선택이란게 그렇다. 둘중의 한가지를 취하면 나머지 하나는 버려야한다. 박정환이 지금까지 선택하기 위해 인생의 뒤편으로 밀어버렸던 것 - 사랑했던 하경과의 추억, 딸아이를 위한 좋은 아빠가 되는 노력, 이태준의 도움을 받으면서 버렸던 검사로서의 양심. 박정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아내 하경을 돌아볼 수 밖에 없다.


하경과 이태준 사이에서 이태준의 권력을 선택한 박정환.


급발진 사고를 제보한 세진자동차 연구원 양상호(류승수)도 선택을 했다. 박정환에 의해 감옥에 갔고 이태준을 저지하려는 윤지숙(최명길) 덕분에 특사로 풀려난 양상호는 정국현(김응수)과 함께 세진자동차의 비리를 고발하려 했지만 높은 연봉을 제안하는 박정환에게 넘어가고 만다. 세진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과 진실의 무게는 양상호에게 현실 보다 무겁지 않았다. 남들 보다 뒤쳐진 성공과 식당일로 고생하는 아내로 고민하는 양상호에게 '늦은 만큼 달려가라'는 박정환의 회유는 그 어떤 유혹 보다 강렬하다. '인생은 한번'이라는 박정환에게도 과거 어떤 날 그런 선택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선택의 날 이후 이태준이 낭독하는 검사 선서는 이미 오래전에 박정환에게 의미없는 공염불이 되어 있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검사',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한때 박정환에게도 이런 가치가 삶의 목표였던 시기가 있었을까. 악성뇌종양은 박정환의 선택 그리고 과거를 뒤돌아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박정환은 왜 이태준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진실과 현실 앞에서 현실을 선택한 양상호처럼 검사 박정환에게도 과거 한때 선택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태준 검찰총장의 선서를 영혼없는 표정으로 따라하고 이태준을 영접하는 수많은 검찰청 사람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이태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는 조강재(박혁권)를 상대하는 박정환의 모습은 아직까지는 치열하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권력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 버린 것이 아까워서라도 과거의 선택을 부정할 수 없다. 검사 선서에 씌여진 좋은 말들을 자신의 선택을 반대하는 아내를 그리고 딸아이를 구해준 유치원 버스 운전사의 생명까지 버렸던 박정환이 얻으려 했던 권력이 악성뇌종양 때문에 멀어져가고 있다. 죽음이란 현실을 부정하고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는 시간 동안 박정환은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진 않을까.


하경이 목격한 급발진 사건은 얼마전 물의를 빚었던 모 자동차회사의 판결과 매우 유사하게 진행된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녹화한 동영상을 보면서 아무리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았어도 이 사건은 운전자 과실로 결론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딱 맞아들었다. 우리 나라의 법은 힘없고 소외된 사람의 편에 서기 보다 돈많은 사람들을 위한 장난감처럼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황금의 제국'이 대한민국 경제 권력을 쥔 자들의 갈등이라면 '펀치'는 박정환이라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법조계의 속성을 집요하게 묘사하리라 기대해본다.


악성뇌종양을 계기로 돌아보게될 박정환의 뒷모습은 곪아터진 대한민국 법조계의 환부를 드러낼 것이다.


'나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간 박정환. 드라마 '펀치'는 검찰총장이 된 이태준과 그 이태준의 약점인 세진자동차 비리를 두고 숨가쁜 이야기를 전개한다. 검사의 의무 보다는 사적인 목적을 양심 보다는 이태준의 지시를 더욱 중요시했던 한 남자가 어느 순간 자신의 선택에 브레이크를 건다. 뭐 어떤 조직이든 인간이든 곪아 터지는 상처없이는 그 조직이나 인간이 병들고 아프다는 걸 잘 깨닫지 못한다. 박정환이 뇌종양 진단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선택을 뒤돌아볼 수 없었듯이. 박경수 작가가 새롭게 써낸 박정환의 인생이야기가 대한민국 법조계의 곪아터진 환부를 얼마나 드러낼지 기대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