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옷소매 고운 끝동, 정조와 의빈 그리고 조용히 살다간 궁녀들

Shain 2022. 1. 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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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사극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왕 사극을 만들려면 드라마의 한 부분을 잘라서 그 시기만 극화하는 건 어떠냐 하는 생각이죠. 특정 시기면 고증을 살펴보기도 편할 텐데 싶어서기도 하고 조선왕조의 오백년 사가 결코 짧지 않으니 긴 딱 맞는 사극 한편쯤은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인종 시기와 명종 시기의 이야기를 극화한 '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라든가 문정왕후가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임꺽정' 이야기는 좋은 소재가 되겠죠. 사극 자체가 일종의 정형화된 이야기인데 시기를 알아볼 수 없는 작품으로 만드는 건 재미가 없죠. 요즘처럼 퓨전 사극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좋은 시기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싶어서 아쉽기만 합니다. 아무리 퓨전 사극이 대세라도 시기만 맞춰도 좋을텐데요.

 

모두가 아무것도 몰랐던 계례식의 아침. 복연이는 눈을 흘긴다.

 

뭐 복연이처럼 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도 조선왕조 생각시들의 이야기만 꾸려도 이야기는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왕실 후궁 궁의 하루를 엿보고 그린 포맷이라면 충분히 흥미롭죠. 꼭 주인공이 아니라도 좋으니 제발 이야기만큼은 정사에서 가져왔으면 좋겠습니다. 평소 궁중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왕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하긴 뭐 그러렇고 궁중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를 못 그릴 테니 그건 다들 싫어하려나요. 뭐 그렇다고 쳐도 요즘은 어울리지 않는 배씨댕기나 늘어트리고 다니는 사람이 더 많으나 시기상 맞지 않은 바람이겠죠.

 

 

 

 

혼자 남은 복연이의 인생은

 

가끔 생각해 봅니다. 경희(하율리), 복연이(이민지) 같은 아이는 애초애 궁녀가 될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선택한다고 해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아무리 선택받은 소수만 궁녀가 될 수 있다 쳐도 궁녀는 평생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성덕임(이세영)은 원래 임신중독증을 앓고 있었다고 하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그 병에 걸린 걸 알았다면 성덕임의 임신은 막을 수 있었을까요. 안타깝지만 당시엔 그 병을 그냥 죽는 병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약을 손수 달여 먹이고 손수 정성을 쏟았는데도 성덕임은 죽고 말았죠. 15년 동안 결혼을 꿈꾸어왔고 결국 결혼했지만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운명인가 봅니다.

 

넷이 함께 어울리던 그 시기에는 이런 문제는 가볍게 처리했는데

 

경희는 이제 제조상궁이 되어 아랫사람들을 통솔합니다. 경희에게 딱 어울리는 자리죠. 반면에 사사당했다는 기록 말고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영희(이은샘)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복연(이민지)이는 혼자 남아 서서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경희는 원래 돈 많은 집 딸이었고 덕임이는 홀로 죽어버렸고 이제는 기억해줄 사람도 남지 않은 것입니다. 궁녀들의 인생은 왜 그럴까요. 마지막 부분에 성덕임의 죽음에 중전(장희진)은 홀로 눈물짓습니다. 오라버니가 죽어도 상중이 아니고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다 보니 서러웠던 거죠. 가장 가까이에서 덕임을 위로하던 중전도 궁 안에 갇혀 그리 지냈습니다.

 

성덕임은 복연이 죽기 전에 죽은 홍국영(강훈)을 생각하며 홀로 눈물지은 적이 있습니다. 홍국영은 바람기 있는 남자처럼 여기저기 웃고 다녔고 항아님 항아 님하면서 놀리듯이 사람들을 조롱하기만 했습니다. 그 모습에 반해 물 한 그릇 떠주는 홍국영을 기다리는 남자도 많았죠. 너 나할 것 없이 물 떠주는 그의 손을 기다렸습니다. 복연의 짝사랑은 그런 홍국영이었고 사랑이라 부르기도 뭐한 그런 감정 때문에 복연은 눈물렸습니. 홍국영에게 고문당했던 경희 앞에서 울면 미안하다며 홀로 눈물을 삼켰죠. 남자를 만나기 힘든 궁중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홀로 아픔을 삭이는 수밖에 없고 아니 사랑이라 부르기도 감정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이젠 더 죽지 말자고 다짐해 보지만

 

그런 안타까운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혼자 살아야 하는 팔자를 서러워한 것인지 두 사람이 진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지낸 적은 없으니(오히려 성덕임과 더 자주 어울렸죠) 복연이는 더욱 서럽게 웁니다. 생각해보면 궁녀들처럼 사랑 한번 나눠보지 못하고 죽은 영희(이은샘)의 인생도 정말 안타까워요. 임신 중에 남몰래 유산을 했다는 경희 '모두가 슬플 걸 알면서도 전 그저 제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이 정말 아쉽고 슬프게만 들리죠.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슬픕니다. 옛날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소설에서처럼 은애 하던 정인과 멀리 떠난다는 그 말처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더 간절히 바라나 봅니다. 궁중에선 아픈 사람은 궁을 떠나야 합니다. 궁을 떠나 혼자 사는 복연이의 인생이 더욱 덧없습니다.

 

 

 

 

승은을 입은 궁녀만 누릴 수 있는 영애

 

다산이 미덕이던 시대에 비교적 노산이었던 덕임에게 너무 잦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게 한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신 중 세번째(임신은 다섯 번이라고 합니다)의 아이를 출산하는 건 보통 몸에 무리가 아니었겠죠. 어쩌면 아이를 낳지 않고 혼자 계속 살았던 게 성덕임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것도 지난 일에 대한 감상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앓다 죽고 승은을 입어도 살아있는 남몰래 앓다가 죽고 그렇게 비정하게 사는 곳이 궁궐입니다. 어릴 때 궁궐을 나가는 영빈(남기애)을 보며 승은 입은 여인만 누릴 수 있는 영애라며 정2품 후궁이 마지막을 덧없고 초라하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 사이 죽었던 사연 많은 제조상궁(박지영)이나 의빈이 그 모습을 부러워했을까요.

 

짧지만 원하는 것도 모두 이루지 못했지만 빈의 인생은..

 

조선왕조사에 슬프고 아픈 이야기만 있던 것은 아니나 궁궐에서 살아가는 '항아'들의 이야기가 슬퍼지는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오로지 궁인들이 한 사람의 여자만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옛 약조를 기억하며 찾아올까 봐 제조상궁을 기다렸지만 결국 그 여인들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제조상궁을그럴만하다고 생각했죠. 예전에는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궁녀들을 출궁 시켜 궁녀들의 원한을 풀어주기도 했고 외간 사내와 통정할 수 없다는 법도 때문에 참수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승은 입은 궁녀들만 누리는 혜택을 바라고 살기엔 그녀들의 삶은 너무 길고 길었습니다. 군밤이나 까먹으며 덕임, 영희, 경희, 복연과 수다나 떨고 이야기나 나누던 그때로 그들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은 과연 이루어진 셈일까요. 성덕임이 정조에게 끝내 전하지 못한 작은 복주머니가 계속 생각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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