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선덕여왕의 권력은 불교 사찰로 완성된다

Shain 2009. 10. 1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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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퓨전사극답게 선덕여왕과 미실의 그릇(?) 대결이 한참인 MBC 선덕여왕. 대원신통이었던 미실, 그리고 신라왕실은 각종 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아 선덕여왕 역시 즉위 2년에 신궁에서 제사를 올린다. 그 시기의 나라는 왕족을 신과 동일시할 정도로 우러러 보아야 왕권이 강화되고 권력 기반을 다질 수 있다. 미실과 그 전대의 왕족(대원신통)은 신라에서 모시던 고유의 신이 있었고 기우제를 올리는 등 국가의 제례를 담당하여 권력의 한 축이 되었다.

선덕여왕의 업적 중 즉위 원년에 적힌 구휼에 관한 부분, 또 침략 전쟁에 대응한 부분 등으로 여왕의 능력은 짐작할 수 있으나 사서의 기록이 선명치는 않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여왕은 김유신, 김춘추, 알천 등을 등용했으며 신생 세력, 가야계에 후했던 것으로 보이고 외교적인 활동에도 그리 둔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주변의 많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배치할 줄 알았다.

경주 황룡사지. 호국의 의미가 강했던 황룡사에 선덕여왕은 지장율사의 건의로 9층탑을 짓는다. 진흥왕 14년에 축조하기 시작한 후 거대한 사찰이 되었으나 고려 시기에 불타버린다.(출처 : 문화재청)


법흥왕을 비롯한 직계 왕족들은 불교를 부흥하고자 했다. 진평왕의 아내, 마야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어머니와 같으니 선덕여왕은 바로 부처 본인인 셈이다. 인자하고 덕이 많고 평화로운 이미지 그대로 백성들에게 덕망을 쌓았다. 사서에 적힌 것 이외에도 '실물'로 남은 선덕여왕의 흔적들이 있는데 바로 수많은 신라의 탑과 불상, 사찰들이다. 권력이 불안한 신생 세력들이 외래 종교와 사상에 열을 올린다고 하던가.

조선왕조의 이성계가 유난히 충성과 지조를 강조하는, 유교 기반의 사회 풍조를 강요했던 것과 같은 이유인 지 알 길이 없지만, 선덕여왕은 아예 탑과 절을 지을 자리를 찾는 전문(?) 승려까지 신하로 둔 상태였다. 김선종랑(金善宗郞)이란 이름의 자장율사는 진골 출신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직에 오르라는 왕의 부름도 거부하고 출가한 인물이다. 대신 승니들의 체계를 정립하는 등 불교의 기틀을 다진다.

흥륜사지. 신라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 승려 아도(미추왕 때)가 지은 흥륜사라고 한다. 후대에 법흥왕과 진흥왕을 거쳐 다시 지어졌다. 영묘사터로 추정되기도 한다. (출처 : 문화재청)


법흥왕 이후 계속 유명 승려들이 포교활동과 사찰 건축에 힘썼다. 전국 사찰 마다 그 창건 유래가 전해오기 마련인데 원광국사, 자장율사, 의상대사, 지명법사, 범일국사, 유일대사, 윤필대사, 의현선사, 연기조사, 원효대사, 의진조사 등 각 왕에게 임명된 고승들이 전국적으로 꽤 많은 사찰을 만들었다. 특히 원광국사와 자장율사는 진골 핏줄로 삼국통일과 호국정신을 불교정신과 융합시키고 왕권 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들의 승려들의 활동은 태종무열왕 즉위 이후에도 이어졌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말년을 승려로 지냈단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 10년(549)에 앙냐라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내오자 왕은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에서 맞이한다. 566년엔 황룡사를 준공하고 576년에 안홍법사가 수나라에 불법을 배우러 다녀온다. 진평왕은 재위 7년(585)에 고승 지명을 진나라에 보내 불법을 배우게 한다. 589년엔 원광법사가 진나라로, 596년엔 담육이 수나라로 떠난다. 그들은 사리와 불경등을 들고 돌아와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고 왕들의 지지를 얻었다.


선덕여왕 시기에 완성된 사찰

  • 선덕여왕 3년(634) - 분황사

    통도사 자장율사진영


  • 선덕여왕 4년(635) - 영묘사(흥륜사터로 추정)
  • 선덕여왕 5년(636) - 칠장사(칠현산, 자장율사)
  • 선덕여왕 7년(638) - 안심사(자장율사)
  • 선덕여왕 8년(639) - 정수사(회정선사)
  • 선덕여왕 9년(640) - 마곡사(자장율사로 추정)  
  • 선덕여왕 11년(642) - 삼화사(자장율사)
  • 선덕여왕 12년(643) - 황룡사 9층탑(자장율사의 권유)
  • 선덕여왕 12년(643) - 광덕사(자장율사)
  • 선덕여왕 12년(643) - 월정사(오대산, 자장율사)
  • 선덕여왕 12년(643)  - 태화사(자장율사)
  • 선덕여왕 12년(643) - 기림사(함월산, 천축국 승려 광유)
  • 선덕여왕 13년(644) - 황산사(현재 이름 봉황사)
  • 선덕여왕 14년(645) - 상원사(자장율사)
  • 선덕여왕 15년(646) - 통도사(자장율사)
  • 선덕여왕 15년(646) - 안적암(원효대사)
  • 부인사 - 선덕여왕 때 창건한 사찰로 추정
  • 인각사 - 선덕여왕 시절 원효가 세운 절

특히 원광법사는 '살생'을 할 수 없는 승려의 몸으로 수양제에게 보내는 결사표를 작성한 걸로 유명하다(진평왕 30년, 608).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는 내용이다. 원광은 또 신하된 몸으로 불교의 '보살십계'를 지키기 어려우니 '세속오계'를 따로 내려 화랑들의 행동윤리로 삼았다. 불교를 믿으면서도 각종 전쟁에 화랑들이 뛰어들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정신적 뒷받침 때문이다.

선덕여왕 3년(634)에는 분황사가 완성되고, 그 다음해엔 영묘사가 완성된다. 14년(645)에는 자장율사의 요청으로 신라를 보호하고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황룡사 9층탑을 건축한다. 터만 남은 것들도 있지만 삼국사기 기록 이외에도 선덕여왕 시기에 지어진 유적지들이 제법 많다.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요청해 신라로 돌아온 자장은 대국통으로 임명되고 국민을 단결, 교화시키며 곳곳에 절을 짓고 왕실의 권위를 세웠고 불교 세력을 강하게 융성케 하였다.

과학자 겸 가야출신 승려로 등장하는 월천대사는 미실 보다는 진평왕 쪽과 가까운 인물로 등장하는 게 어땠을까? 당시에 활약한 수많은 승려들은 왕권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신라엔 호국을 위해 지어진 사찰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마다 징조를 보여줬단 황룡사고, 문무왕을 수장한 후 만들었다는 감은사, 그리고 당나라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사천왕사가 있다.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당의 50만 대군을 막을 방법을 묻고, 법사는 신유림에 절을 지어 부처의 힘을 빌리라 말한다. 침입해올 때까지 시간이 모자라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춰 대비하자 당나라 군사가 침략하러 오는 도중 모두 가라앉았다 한다.

사찰은 터만 남거나, 후대에 덧지어진 경우 창건연기가 없으면 연대를 알 수가 없다. 전쟁으로 모두 불타버린 곳도 다수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선덕여왕 시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불교에 많은 정성을 쏟았으며 사찰에 아주 많은 재정을 소모했다는 점이다. 그 부분은 여왕의 실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적을 뒤져보면 문무왕을 비롯한 다른 왕들도 적극 왈용한 통치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은 김유신 등 신생세력과 불교의 도움으로 성골 이미지를 강조하고 왕권을 무사히(?) 지킬 수 있게 된다. 진골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맞선 것이다. 또 전체 신라 역사를 살펴볼 때 불교를 활용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강력한 진골이 신라의 약점이 되었듯 통일신라 후대에는 신라의 불교 역시 부를 추구하고 정권에 개입하는 폐단을 보이게 된다.


이미지출처 :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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