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미실, 이제 그녀의 최후 평가를 남겨두다

Shain 2009. 10. 1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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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사극에서 후궁의 정치 참여는 궁중 암투 정도로 부각되던 게 사실이다. 달콤한 말과 눈물로 왕의 마음을 뺐고 권력을 농락하던 후궁이 여성 영웅의 부각과 더불어 왕을 공포에 떨게 하는 후궁으로 발전했다. 미실 새주의 출연 회수가 8회 연장되었다는데 앞으로는 서서히 몰락해가는 일만 남은 그녀의 앞날이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그녀는 과연 소설과 같은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것인가?

선덕여왕의 재미 중 하나는 기존 사극(주로 환상의 인물을 활용한 판타지 사극이지만)이 활용하던 한가지 틀을 벗어났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을 정점으로 펼쳐지는 영웅의 대의와 모험담, 그리고 성장이 기존 사극의 내용이었다면 선덕여왕은 주인공 이외의 인물도 꼼꼼하게 설정하고 다섯명 이상의 중심인물을 활용하는 패턴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가치관이 탐탁치 않으면 시청하기 힘들었던 드라마를 조연 캐릭터로 인해 시청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몰락을 앞둔 미실은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탄생을 비롯하여 한 시대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 선덕여왕을 가장 닮았을 듯한 미실의 캐릭터.


기존 성골들과 경험이 달라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덕만공주와 지독한 끈기와 인내로 결국 신라 최고의 권력자, 그것도 왕에맞먹는 권력을 가지게 되는 김유신, 권력자의 자질을 타고 났으나 슬픈 출생과 성장으로 파멸하는 비담, 사랑도 권력도 모두 차지하지 못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공주 천명과 비교적 어린 나이에 권력자로서의 자질을 보였으나 차기 권력자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하는 김춘추까지. 그들의 가치관과 운명이 충돌하는 재미는 어떤 드라마도 보여주지 못한 장점이다.

무엇보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최고 권력을 차지하는 미실은 드라마의 핵심 캐릭터로 젊은 주인공들이 겪어야할 난관이자 목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끝없는 야망으로 신라를 장악하고 끊임없이 사람을 모아 천하를 얻으려 애쓰는 미실은 설원랑의 표현대로 진흥왕 이상의 식견을 갖춘 인물이다. 어떤 신라의 신하도 미실을 넘어설 수 없었고 왕인 진평은 왕자시절부터 자신의 아내가 되려는 미실에게 공포를 느껴야했다.

정치인 미실은 사람을 살인하며 잔인하게 미소짓는 악녀 캐릭터에 필요없는 인물이나 정적을 제거할 때도 약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는 인물이지만 공식적으로 사람들이 지탄할만한 '악행'은 저지르지 않는 타입이고 받은 만큼 보답할 줄 아는 인물이다. 절에 가서 비구니가 되라는 진흥왕의 유언을 무시하고 자신을 왕후로 삼지 않는 진지왕을 도모하려 하지만 선왕의 유지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주변의 호응은 얻되 도덕적 약점은 남기지 않는다.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라는 말처럼 미실의 사람들은 뛰어나다. 각기 야심을 가진 인물들을 오랜 세월 이끌어왔음은 그녀의 정치적 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다.


덕만공주가 지적한대로 미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민심이다. 천신황녀로 기우제를 지내고 일식과 월식을 예언하며 백성들을 단호하게 다스리지만 민심이 돌아선 위정자가 되는 일은 거부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진평왕의 적녀, 천명공주가 죽었을 때 미실이 '몸을 바짝 낮추라'한 건 천명공주의 죽음으로 자신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실권은 미실 자신과 상대등 세종이 모두 갖고 있을 지라도 왕을 무시한다거나 함부로 대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미실을 현대 정치인에 비교하며 드라마 속 상황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비난을 받는 그들 정치인 중 미실과 같이 '국민의 시선'을 두려워했던 인물은 없다. 정권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자라면 반드시 가져야할 공정함에 대한 감각, 최선을 다하되 비겁하지 않은 자세, 유권자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겸손함이 배제된 인물은 드라마 속 미실의 캐릭터와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도 없다. 미실의 캐릭터를 등에 업기엔 무리한 정치인이 훨씬 더 많다.

신라 왕실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줄 최고의 캐릭터 이 미실도 곧 최후를 맞을 것이다. 지난번에도 적은 대로 미실은 정식 사서에 단 한줄도 기록되지 않은 인물로 덕만공주와의 싸움은 당연히 패배할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덕만은 이미 미실의 장점을 인정했으니 미실도 곧 진검을 빼들지 않겠는가? 또다른 승부수가 될 싸움은 사서에 적힌 대로라면 칠숙, 석품의 난이 남아 있다. 비담이 미실의 아들 자격으로 덕만공주의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중국에서 고생하며 자라고 목숨을 위협받았던 덕만은 '성골'이라는 점에서 유리하다.


사실 시장경제나 정치관에 대한 설정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 진골 타파를 외친 김춘추와 나라의 주인을 운운한 덕만공주의 주장은 시대를 앞서기 보단 시대적으로 적용하기 힘든 가치관이다. 일본에도 여왕(비미호 여왕이 있었다)이 있었고 모계가 강력한 신라에 성골 여왕이 나올 수는 있지만 진골인 미실이 여왕까지 되길 꿈꾼다는 건 불가능한 상상이 분명하다. 신라는 영원히 나라의 근본인 골품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화랑세기 속 미실은 선덕여왕을 넘어선 인물로 남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다. 오히려 지금 등장하는 선덕여왕의 기상은 미실을 더 닮았다. 미실에게 모자란 것은 신분 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 왕실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그녀의 표현대로 한 시대를 가진 여인이었다. 성골이라는 신분의 장점을 가진 덕만, 성골과 진골의 피를 이어받은 김춘추, 이 두 사람과 미실은 출발점이 다르기에 실제 역사에서 세 인물의 그릇을 비교한다는 건 무의미하다.

설정대로라면 유학파(?)인 덕만공주는 미실과 두가지 점이 다르다. '백성을 위한다'는 대의를 생각했다는 부분과 삼국통일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이다. 덕만과 춘추가 신분 만이 아니라 가치관까지 다르다는 점에 미실은 절망하지만 다시 태어난 미실이 마지막까지 영원히 최고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최선을 다하길 바랄 뿐이다. 혈통에서 우위를 차지한 덕만공주 조차 가질 수 없었던, 그런 독자적인 위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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