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TV 속 악녀의 계보를 잇는 신은경

Shain 2010. 10. 18. 07:56
728x90
반응형
최근 저는 미국 드라마를 더 많이 보는 편이라 미드 속 악녀를 뽑아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워낙 악당이 많아 뽑기가 힘들더군요. 한국 드라마에도 악녀들은 많지만, '이해 불가' 판정을 받는 못된 캐릭터들이 훨씬 많은 거 같습니다.

최근 'MBC 욕망의 불꽃'에서 악녀를 연기하는 신은경씨의 인터뷰를 읽고 인상적인 악역을 한다는 건 배우로서 상당한 '연륜'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감정이 고조되는 그 역할을 해내는데 무척 체력이나 정신적으로 타격이 클 테니까요.

신은경씨는 2010년 최고 악녀 타이틀은 무리없이 따실 거 같더라구요. 악녀 연기는 오래 지나도 기억에 남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우리 드라마엔 특히 사연있는 악녀가 많지요.

MBC 욕망의 불꽃, 윤나영 역의 신은경


TV가 오락거리의 전부이던 옛날옛날엔 TV에서 악역을 맡았던 배우는 길거리를 곱게 지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 악역에 반감을 느낀 시민들이 실제로 화를 내며 따지러 오기도 했었다네요. 그만큼 연기를 잘했다는 뜻일텐데 여러분은 어떡 악녀가 기억에 남으시나요? 길거리에서 등짝맞았던 TV 속 등장 인물 1순위들을 뽑아봅니다.



너를 부셔버릴거야, 청춘의 덫의 심은하

이 사람을 가장 기억에 남는 악녀 1순위로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편이 될 거라 믿어의심치 않았던 남자친구가 부잣집 딸 영주(유효정)와 약혼하고 딸과 자신을 버립니다. 그 딸 조차 병으로 죽어버리고[각주:1] 아무것도 남은게 없게 된 여주인공 윤희(심은하)는 독하게 복수를 마음 먹습니다.

여성팬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밖에 없었던 버림받은 여자와 여자를 버린 비정한 남자. 이 악녀 보다는 남자친구 동우 역할이었던 이종원이 길에서 등짝 테러를 종종 당했다고 들었어요. 그만큼 불쌍한 악녀였던 거죠. 연기자 이종원은 '젊은이의 양지(1995)'에서 아이까지 있으면서 여자버리는 역할을 맡더니 이 청춘의 덫으로 아예 여자버리는 역할로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SBS 청춘의 덫(1999)


'나는 못할 짓이 없어'나 '부셔버릴거야' 같은 독기에 찬 대사가 유명하긴 합니다만 이 여주인공의 복수에는 공감이 가는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영국(전광렬)의 사랑을 받아 제 2의 인생을 사는 그녀의 운명도 비난만 하기에는 너무나 행복해보입니다. 사랑에 버림받은 인물이었고 결국 사랑을 찾아내는 비결도 알았던 그녀는 시청자의 사랑을 충분히 얻어낸 악녀가 아닌가 합니다.



언니의 출생을 뺏어버린 여동생, 사랑과 진실의 원미경

최근 악녀들부터 훑어볼까 했는데 최근 드라마들엔 악녀가 너무 많아 생각 보다 꼽기 힘듭니다. 드라마 구조가 단순했던 과거의 악녀들이 차라리 더 기억에 남습니다. 김수현 극본의 사랑과 진실은 일본 만화 '유리의 성'을 표절한 것이란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시청 중 만화에서 본 내용이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재봉일을 해서 간신히 먹고 사는 효선(정애리), 미선(원미경) 자매의 어머니는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성실한 효선에 비해 놀고 먹기 좋아하는 미선을 훨씬 구박합니다. 효선의 대학 등록금을 구하러 어딘가를 다녀오던 자매의 어머니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죽게 되고 효선이 부자의 숨겨진 딸이라는 비밀을 폭로하죠.

MBC 사랑과 진실(1984)


상경해 어렵게 살게 된 미선은 언니를 대신해 부잣집 딸이 되고 신데렐라가 됩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며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일상도 자신과는 맞지 않은 그들의 생활도 원미경의 약점이 되죠. 남의 자리를 뺏은 '년'이란 비난을 많이 받았던 독종 원미경의 얼굴이 종종 생각납니다. 요즘 같으면 DNA 검사 한방에 해결되는 문제인데 복잡한 드라마가 되버렸죠. 지금 생각해보면 요즘 나오는 악녀들 보단 참 착한 여자에요.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임이네, 토지의 박원숙

이 분의 억척스러움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지독한 임이네는 못된 구석은 있을 지언정 원래부터 그런 여편네(?)는 아니었죠. 남편이 나쁜 일에 연루되어 죽고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되자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자식들은 굶어죽어갑니다.

KBS 토지(1987) 오른쪽 뒷줄 맨끝이 임이네 역할의 박원숙


강청댁과 월선이 떠나 홀로된 용이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용이의 아들 홍이를 낳게 되죠. 월선에게 선뜻 갈 수 없는 용이의 약점이자 아들 홍이의 아픔으로 평생을 함께합니다. 늙어 허리 아프다며 고양이까지 잡아먹는 박원숙씨가 독한 역할로 화제에 올랐죠. 당시로는 섹시한 이미지도 있는 스타셨는데 이때의 독한 이미지가 고정된 것 같아 아쉬운 배우 중 한분이죠.



사랑했던 남편의 배신, 불새의 정혜영

절친한 친구의 옛 남편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미국에서 사랑에 빠진 준과 결혼한 윤미란 역의 정혜영은 당시 신선한 악역 대열에 올랐습니다. 소름끼치는 눈빛도 어딘지 모르게 광기어린 듯한 표정 연기에 목소리까지 겹쳐서 시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었죠. '우리 준'이란 대사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MBC 불새(2004)


슬픈 마지막을 맞는 정혜영의 악역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하나 뿐인 여자친구 이지은(이은주)의 첫사랑을 얼굴만 몰랐을 뿐 윤미란(정혜영)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커플을 위해 별장을 빌려주기도 했었죠. 미국에서 만난 운명같은 남편(이서진)이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 친구이고 친구가 불꽃같이 사랑했던 그 남자가 바로 자신의 남편이란 사실에 그녀의 광기가 드러난 거겠죠.



욕망의 출구를 못 찾는 악녀, 진실의 박선영

이신희(박선영)네 집 지하에서 더부살이하는 이자영(최지우)은 모든 면에서 신희 보다 뛰어나고 생각하는게 다른 인물입니다. 따분한 인생을 탈출할 욕망 밖에 없는 신희에 비해 자영은 성실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착실히 살아나가는 인물입니다. 국회의원 집 장녀란 자신의 신분이 오히려 본인을 더욱 옥죄는 굴레가 되어 '못된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을 부채질하게 되죠.

MBC 진실(2000)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자영에게 뺐으려 했던 인물입니다. '악'의 동기가 갈 곳없는 욕망이죠. 대학입학 시험도 자영이 대신 치르게 하고, 왕자님 역의 정현우(류시원)을 자영에게 뺏으려 하지만 사기꾼에 볼 것도 없는 박승재(손지창)의 짝이 됩니다. 권선징악적인 결말에 따라 모든 걸 잃고 죽지만 미워할 수 만은 없는 불쌍한 악역으로 죽죠.



쌍둥이 동생의 삶을 뺏고 싶은 덕이의 강성연

업둥이로 들어와 쌍둥이로 자란 귀덕과 귀진 자매의 사이는 특별합니다. 귀진이는 귀덕이를 괴롭히는 역이거든요. 군수의 딸로 입양될 뻔한 귀덕을 대신해 귀진이 그 자리로 들어가고 군수 부인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도 늘 더 나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기를 씁니다.

강성연이 연기한 귀진의 역할은 '악역'의 동기가 시기인지 질투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귀덕의 친아버지인 빨치산이자 북한에서 내려온 상혁(김주승)이 북한으로 귀덕을 데려가려 한 적도 있었는데 귀진은 그 자리 조차 자신이 차지하려 한 적이 있습니다. 귀진은 덕이를 자신의 인생을 방해하는 인물로 인식하고 있죠.

SBS 덕이(2000)


이런 식의 악녀는 드라마에서 제법 흔한데 강성연의 귀진은 상대적으로 귀덕이 너무 착한 까닭인지 역할이 참 도드라졌습니다. 독하디 독하게 귀덕의 사랑까지 뺏어간 인물이지만 그 사랑에 실패하고 자신의 삶까지 망가뜨리는 극적인 성격이죠. 술집 스트립 댄서로 일할 때까지 망가진 귀진은 결국 드라마 마지막에 개과천선하지만 당시에 길거리에서 등짝맞는 여성 1순위였다고 합니다.



중전도 두렵지 않았던 경빈, 여인천하의 도지원

도지원은 이 역할 이후로 악역을 더 자주 맡게된 듯합니다. 발레리나 출신이라 데뷰 때는 고운 역할을 자주 맡았던 도지원에겐 상당한 파격이었죠. SBS의 여인천하엔 정치적인 악역들이 상당히 많아 딱히 악녀를 뽑기 힘들지만 도지원의 역할이 너무 인상적이라 일찍 죽었어야할 경빈의 출연시기를 연장했을 정도라 하죠.

중종의 총애를 받던 왕실 제 1의 후궁으로 중전과 맞서거나 조정 중신들을 움직였던 경빈의 '뭬야'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유행어입니다. 주인공인 문정왕후는 조선왕조 최고의 악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정난정도 사서에 기록될 만큼 악랄한 정경부인이었는데 그 사람들과 대등한 독기를 자랑했다니 역할을 참 잘 한게죠.

SBS 여인천하(2001)


경빈 도지원의 마지막 사약받는 장면은(실제 경빈은 자신의 출생지인 상주로 유배를 가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장희빈의 죽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복성군과 함께 죽게된 경빈, 죽기싫다고 발버둥치는 그녀에게 사약을 들이붓죠. 드라마를 연장시킨 악녀 경빈의 매력이 참 재미있었는데 이런 캐릭터가 종종 아쉽군요.



모든 고통을 되돌려주고 싶은 아내의 유혹의 장서희

점찍고 이름을 바꾼 채 돌아온 민소희의 복수는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배신을 당해 원한이 서린 아내와 그 아내의 지독한 복수라는 통속적인 구조로 21세기에도 인기를 끌 수 있을 지 의심스럽던 내용이었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매력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드라마를 끌고 나가는 이 복수의 화신은 말도 안되는 내용임에도 재미있었죠. 또 주인공 은재를 버리는 남편(변우민)과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캐릭터도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파워를 휘둘러 복수하는 전 아내와 그런 행동을 인정하게 만드는 나쁘기만 한 악역들의 존재. 상대편에서 독기를 내뿜던 신애리(김서형) 보다 구은재가 더 지독해 보입니다.

SBS 아내의 유혹(2008)


남의 신분과 이름을 가진 채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제 2의 인생을 사는 구은재는 구느님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완벽한 파워를 손에 쥐고 복수를 해나갑니다. 살인을 저지른다던지 법을 무시한다던지 잘 따져보면 설득력없는 그녀의 복수지만, 이런 타입의 악녀도 인기를 끌곤 하네요.



두 얼굴을 가진 대비마마, 이산의 김여진 

'MBC 이산'에서 정순왕후의 첫등장은 그리 거세지 않았습니다. 사도세자를 휘령전 뒤주에 가두고 굶겨죽이라는 영조의 명에 어미로서 도저히 두고볼 수 없다며 무릎꿇고 살려달라 하소연하던 중전이었죠. 그렇게 등장했던 정순왕후는 금방 본색을 드러냅니다. 권력욕의 화신처럼 노론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었고 사도세자를 죽게 한 배후로 활약합니다.

물론 역사에 비해 그녀의 역이 과장된 점이 있습니다만 또다른 악녀 화완옹주와 더불어 이산 정조의 정적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서에 기록된대로 남들이 볼 때는 조용한 얼굴로 웃음지었고 현명하던 어린 중전이었지만 실제로는 뒷공작의 달인이었죠.

MBC 이산(2007)


정치적인 악역은 감정적으로 파악하면 안됩니다. 노론의 수장 역할을 맡은 이상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를 따르는 인물들의 목숨이 그 수장에게 달려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천주교 박해 등 수렴청정 기간 동안 비판을 받을 만한 일들을 많이 했던 인물이었고 드라마에서는 정조의 정적으로 남성 못지 않은 저력을 발휘한 인물이니 악녀 중의 악녀로 뽑아도 될만하겠네요.



천하를 휘두른 여왕, 선덕여왕의 미실

2009년 한해를 장악했던 드라마 'MBC 선덕여왕'은 퓨전 사극을 정치 드라마 급으로 업그레이드 시킵니다. 그리고 절대 '못됐다'라는 말 만으론 설명이 안되는 영웅형 악녀를 탄생시킵니다. 신라 최초 여왕인 선덕여왕의 스승이자 라이벌같은 '미실'이란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죠.

그녀는 나름 다스리는 자의 철학이 있기에 아랫 사람 위에 군림합니다. 자신이 정권을 쥐든 왕이 정권을 쥐든 문제가 없도록 하면 된다는 정치론을 펴기도 합니다. 현대인도 비슷한 논리를 편 사람이 있기에 딱 부러지게 반대하기 힘든 정치인의 파워를 내뿜습니다. '신라를 사랑했다'라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기에 개인의 야망을 비난할 수만도 없습니다.

MBC 선덕여왕(2009)


전무후무한 TV 드라마 속의 영웅형 악녀. 미실의 탄생은 사극과 정치 드라마의 성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잔인할 정도로 냉혹하게 정적을 제거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식도 버리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한 미실은 '비담'이라는 아들을 대할 때 이외에는 결점을 거의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악녀라면 이정도의 완결성은 보여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하죠.

연기자에게 자신의 역할을 고정시키는 무덤이자 여러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발전의 기회인 악역. 시청자들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으려면 그만한 배역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이상하게 악녀가 더 기억에 남을까요. 강렬한 그들의 파워 때문인지 아니면 공감이 되는 사연 탓일까요?

요즘은 사연있는 악역 보다 그냥 못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욕망의 불꽃'의 신은경은 아직 망설이는 남편의 사랑을 얻을 기회가 있음에도 번번히 다른 곳을 보느냐 놓치고 맙니다. 엉뚱한 것에 눈 멀어 정작 눈앞의 행복을 못 잡는 사람들이기에 악역이면서도 비난받기 보다 동정의 여지가 있는 그들은 시선을 끕니다. 과연 서우와 신은경이 그 뒤를 이을 수 있을까요?


  1. 극중 여주인공의 딸 혜림이는 사고로 죽는다고 합니다. (수정) [본문으로]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