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풍선/有口無言

신라를 휘젓고 간 자연인 미실

Shain 2010. 11. 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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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드라마 'MBC 선덕여왕'에 미실이 등장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연상된 건 김별아의 소설 '미실'이었다. 화려한 색의 앵두꽃인지 배꽃인지 알 수 없는 꽃그림이 그려진 소설책, 2005년경 처음 읽었던 '미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의 본문이 책의 본질을 결정할 지언정 책의 첫인상은 표지가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화랑세기에 대해 처음 읽은 건 2000년 경이었다. 필사본으로 사서인지 위서인지 조차 판단하기 힘든 파란을 몰고 온 책, 그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드문드문 상식 밖의 신라 문화들이 귀에 들어왔다. 마복자(磨腹子), 색공지신(色供之臣), 대원신통(大元神統)이란 낯선 단어들의 전후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소설 '미실'의 내용은 화랑세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천하미색 미실이 신라 왕성 안의 남자들을 어떻게 홀렸으며 어떻게 권력에 정점에 올랐는지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그녀의 치마폭에 감싸였던 신라왕실의 소란도 대동소이하다. 이 소설의 첫인상이 몽글몽글한 꽃이었던 것처럼 소설 속의 미실이 한 알 앵두를 입에 담았던 것처럼 같은 이야기임에도 다만 조금 다른 미실이 그 안에 살아 있을 뿐이다.



글 속에서 뛰어나와 비내린 초여름 정원에서 서슴없이 앵두나무 가지를 흔드는 여인. 'MBC 선덕여왕'의 미실, 배우 고현정으로 다시 태어난 미실과 책 안에 갇힌 미실은 전혀 다른 사람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세종과 결혼했고, 사다함을 사랑했고. 설원을 애인으로 두고, 진흥제와 동륜과 진지제와 진평제를 모신 여자, 원화이자 전주이자 궁주였던 그 여자 미실은 오직 한 사람 뿐임에도.

사랑을 아는 나라 신라에서 미실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상사병을 앓아 미실을 옆에 두고 만 세종이나 아끼는 아우의 아내이자 일곱살부터 함께 한 아내 사도왕후의 조카임에도 미실을 빼았는 진흥제, 단 한번의 사랑으로 평생 잊혀지지 않았던 사다함 조차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미실에게는 한때의 욕망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욕심이었다.

왕족에게 색(色)을 바치는 것이 가문의 최고 의무이자 권리였던 대원신통의 여자. 미실의 할머니인 옥진궁주는 미실을 직접 돌보며 최고의 여성으로 키워낸다. 그녀가 가르친 건 가문 대대로 내려온 춘약과 비술 만은 아니었다. 헐벗은 채 숲에서 뛰어놀며 모든 것들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며 자란 미실은 사랑도 색사도 한몸이 되어버린 자연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TV 안의 젊은 미실은 옥진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어린 미실의 환생인 듯 자유롭고 영민하게 자신의 욕망을 펼쳐나갔다. 화랑을 어우르고 권력을 향해 질주함은 인위적인 무엇이 아니라 무르익는 과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추하고 아름답고를 구분하기엔 모두 똑같이 세계의 질서였다. 발그레하게 피고 붉게 익고 과농해 사그라드는 모든 과정이 한 가지의 물앵두같다,

책에서 어린 그녀가 앵두나무 가지의 모든 앵두를 훑어 입으로 넣어버렸듯 미실이 왕족을 희롱하며 사랑하고 떠나가는 이야기는 모두 한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으니 바로 색공지신이다. 신라 왕족의 결합, 계승을 기록한 원작 화랑세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미실이 색을 즐기는 그 순간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을 그냥 '이야기'로서 평가한다면 한마디로 '에로틱'이란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야기가 아니라 화려한 문장에 있다. 평범한 언어로 적었다면 미실의 적나라한 연애에 불과했을 장면이 어디서 끌어왔는 지 모를 낯선 단어로 마치 꿈속의 한장면처럼 느껴진다. 웅숭깊어져, 욀총, 강파른, 근덕근덕, 얄망궂게, 능놀아, 끼끗한 같은 생소한 단어들이 눈을 채운다. 대원신통의 본질을 알고, 미실의 생애를 관통하는 사랑을 묘사하려면 이쯤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잘 익은 어여뿐 열매 아니면, 그 열매를 맺게 한 앵두꽃을 닮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여주인공, 인간세상에 와 섞이고 부대끼고 한 시대를 가졌음에도 마치 현세엔 발도 디디지 않은 인물처럼 몽환적인 사람, 탐욕스러운 색공 조차 아름답게 받아들인 미실. 그녀에겐 넘치는 권력 조차 한때 계절에 따라 스쳐가는 폭풍의 일부였고 자연의 희노애락이었을 뿐이다. 물앵두의 이미지가 떠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

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
국내도서>소설
저자 : 김별아
출판 : 문이당 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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