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근초고왕

근초고왕, 백제 제도를 정비한 건 고이왕이다

Shain 2011. 3. 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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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똑똑한 여성이라도 아내를 둘이나 두는 것은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편에게 후사를 낳아줄 수 있는 여인이고 싶은게 평범한 아내의 마음인데 동등한 권리를 가진 여성이 둘이나 있다는 게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아무리 왕후의 자리가 '여자'로서 사랑받는 자리가 아니라 외척을 등에 업고 권력을 조율하는 자리라지만 사람인 이상 똑같이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은게 당연합니다.

제 2왕후이면서도 완월당을 차지한 위홍란(이세은)은 근초고왕(감우성)과 부여화(김지수)의 첫날밤, 신방으로 쳐들어가 나의 아이를 태자로 인정해달라 요구합니다. 자신에게 당연히 그정도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홍란에게 소숙당 부여화는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로 거래를 한다며 나무라고 태자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니 벌써부터 결정하고 볼 일이 아니라 댓구합니다. 근초고왕은 두 여인의 다툼을 보며 분노하면서도 태자는 자질을 보아 결정하겠다며 중립을 선언합니다.


극중 두고(정흥채)의 표현대로 여자의 사랑만 그런게 아니라 관직을 받는 신하들도 주군의 사랑을 두고 다투는게 인지상정입니다. 주요 관직을 두고 토착 세력인 진씨, 해씨 그리고 요서 출신 세력들이 미묘한 갈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진씨는 자신들이 일등공신이니 위사대장군, 좌평을 비롯한 모든 요직을 자신들이 차지할 거라 믿고 있고 몰락한 해씨는 숨죽인채 남당에 들어갑니다. 요서세력은 높은 관직을 기대하며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한땅 일통을 꿈꾼다고 천명한 근초고왕은 물론 그들이 꿈꾸던 공훈을 포상을 내리지 않습니다. 남당의 제도도 개혁해 좌평을 둘에서 여섯으로 늘이고 구세력을 위한 기로부를 설치합니다. 즉 관직의 수를 늘이고 임무도 세분화한 것입니다. 개혁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귀족 중심의 나라라는 백제에서 복구검(한정수), 파윤(강성진), 두고(정흥채), 아즈카이(이인) 등의 신분이 낮은 인재도 고위직에 등용합니다.



제도를 정비한 건 근초고왕이 아니라 고이왕

어제 드라마 방영분에서 근초고왕은이 좌평(해건, 진정)이 둘이던 것을 여섯으로 늘였다고 발표했습니다. 백제의 내치를 담당하는 내신좌평 진승(안재모), 중앙군을 총괄하는 위사좌평 복구검, 지방군을 총괄하는 병관 좌평 위비랑(정웅인), 재정을 담당하는 내두 좌평 파윤, 예약을 책임지는 내법 좌평에 아지카이, 형법을 책임지는 조정 좌평에 해건(이지훈)이 그들입니다. 궁의 군사를 총괄하는 위사대장군으로는 왕자도 아닌 두고가 임명되었습니다.

이들 여섯 좌평은 조선시대의 육조에 해당하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과 역할이 유사하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입니다만 이런 식으로 백제의 제도를 개편한 사람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고이왕입니다. 사반왕의 왕위를 찬탈한 계왕의 조부이죠. 고이왕은 6명의 좌평을 1품으로 두고 달솔을 2품으로 두는 등 모두 16품의 백제 제도를 정비한 인물로 실질적인 백제의 기반을 닦은 왕입니다.

전에도 이 드라마 '근초고왕'이 복색 고증이 참 잘된 편이라 말씀드렸는데 6품 이상의 신하들에게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장식된 관을 쓰도록 한 것도 바로 이 고이왕 시기의 일입니다. 11품 이상은 붉은 옷,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자세히 색을 구분했습니다. 남당의 신하들이 보라색 옷을 입고 일렬로 서 있는 것은 삼국사기 기록에 부합하는 장면입니다. 왕후의 옷 색깔은 딱히 적힌 것이 없으나 중국이나 다른 시대의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관등에 따라 의복의 색이 결정되어 자주색, 붉은색, 푸른색으로 나뉜다. 부간태가 16품 이상이다.


또 고이왕 시기의 '어라하'의 복색을 제법 자세히 기록해두었는데 큰 소매 도포, 푸른 비단 바지,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 흰 가죽끈, 검은 가죽 신을 착용하고 남당에 앉아 정사를 처리했다고 합니다. 비류왕(윤승원)의 복색을 기억해보시면 사서의 기록과 이미지가 같다는 걸 아실 듯 합니다. 고이왕은 이외에도 형법을 정비하는 등 상당히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죠. 드라마는 고이왕의 업적을 모두 근초고왕의 것으로 바꾼 듯 하네요.

그리고 남당의 행동을 자문하고 감독하는 '기로부'라는 부서를 설치한 것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달리 기록되지 않은 감찰 자문기구입니다. 어라하의 노란 옷 색깔, 황후가 공식석상에서 입는 붉은 옷, 기로부, 그리고 가문 중심이 아닌 인재 중심으로 관직에 천민을 등용 한 것 등은 다른 나라의 경우를 들어 근초고왕의 남다른 야망을 보이기 위해 작가가 첨가한 것으로 판단됩니다(천민 등용은 무리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

무엇 보다 중요한 건 고흥(안석환)이 후학을 양성하겠다고 공언한 일입니다. 알다시피 삼국에는 모두 학문을 담당하는 '박사'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 고흥이 처음 '사기'를 기록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건 학문 기관을 설치하겠다는 뜻이고 고흥과 후대 왕인 박사가 문화를 전파하는 발판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백제의 문화를 통한 '해외 정복'이 시작된다는 뜻이죠.



고구려왕 사유는 전의를 다지는 중

망신스럽게도 왕후의 연에 숨어 목숨을 구하고 대장군 고치수(박철호), 국상 조불(김응수), 막리지 소우(원상연)의 희생으로 간신히 부여구에게서 탈출한 사유(이종원)는 전연에게는 제 1왕후를 빼았기고 백제에게는 제 2왕후를 빼앗기는 크나큰 치욕을 당했습니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사유가 다스리던 시절의 고구려는 시대적 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 사유가 그닥 무능하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근초고왕의 영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내를 두번이나 빼앗기고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죽이겠다'며 부여화에게 활을 쏘는 인물로 묘사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대장군 고치수를 후하게 대접하고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말하는 그 역시 고구려의 영웅이자 왕이며 근초고왕의 적수로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근초고왕 즉위 24년에 사유가 차양땅을 침략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아직 두 왕의 충돌은 조금 더 기다려야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차양에 침략한 사유를 대적한 건 백제의 태자 근구수(혹은 휘수)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태자'를 잘 정하지 않는 백제였다는데 이 시기쯤 근초고왕은 아들 근구수를 태자로 두고 전쟁을 지휘하도록 지시한 듯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위홍란의 아들 부여근이 그 역할을 하게 되겠죠.

부여화가 벌써 임신해 홍란은 위기의식을 느끼지만, 근초고왕이 골치아프게 생각하는 후계 갈등은 그때쯤이면 이미 마무리 될 거란 뜻이 되겠죠. 한편 멀리서 묘지기 일을 하고 있는 부여찬(이종수)과 부여산(김태훈) 형제는 다시 위례궁과 손을 잡고 반란을 꿈꾸고 마한 정복으로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을 일으키려 합니다. 백제는 왕이 부재시 동생이 왕의 일을 대신 맡아보았다는 기록이 종종 있는데 마한 침략에 나선 근초고왕을 대신해 부여몽이 죽는 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 이 글은 KBS 근초고왕 홈페이지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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