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짝패

짝패, 막순은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Shain 2011. 3. 29. 10:03
728x90
반응형
드라마 '짝패'의 초반부에는 막순(윤유선)을 짝사랑하는 쇠돌(정인기)의 서글픈 회상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님의 분부로 막순이 이참봉의 방에 들어가는지 들어가지 않는지 확인하러 온 쇠돌, 너 어쩌려고 이런 짓을 하냐는 쇠돌의 추궁에 막순은 주인 나리가 면천해주기로 했다며 상관말라고 모질게 쇠돌을 내칩니다. 자신의 정인을 떼어내는 막순은 평소에도 양반 신분에 미련이 많은 듯이 보였고 이참봉을 좋아했지만 마님 때문에 죽지 않으려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와서 밝혀진 막순의 끔찍한 과거, 못된 양반인 이참봉은 강제로 막순을 비첩을 삼았고 여종인 막순은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의지로 비첩이 되었다고 여겨왔던 많은 시청자들이 이 두 부분의 괴리에 이상함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막순이 주연급에 비해 감정의 흐름이 잘 설명되는 인물도 아니고 두 주인공 천둥(천정명)과 귀동(이상윤)의 신분을 바꿔버린 악녀 캐릭터이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주인 잘못 만나 비첩이 된 여인들

극중에는 막순 말고도 자의가 아니라 주인의 강제에 의해 비첩이 된 또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삼월(이지수)이라는 김진사(최종환)의 여종입니다. 그녀는 현재 권씨(임채원)에 의해 홀아비가 된 전임 현감(김명수)의 살림을 거들고 있으며 현감의 아이를 임신하는 등 비첩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끼니를 챙기고 쌀 떨어지면 두루마기를 팔아주고 곡식을 꾸러가는 부인이나 다름없는 이 여종을 현감은 도박 때문에 팔아넘기려 듭니다.

삼월은 현감이 워낙 징글징글하니 차라리 조선달(정찬)으로 주인이 바뀌는게 낫겠다 싶다하지만 잠자리 하나 제 맘대로 못하는 노비의 삶이 제 뜻대로 될 리는 천부당만부당입니다. 노비들이나 여종들이 원래 비천하고 어리석은 계층이라 그런게 아닙니다. 참다참다 도망치면 추쇄꾼이 쫓아와 목숨을 위협하고 말을 거역하면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고 새끼들의 생명까지 위협받으니 양반들의 '재산'인 노비의 선택권과 생각의 폭은 당연히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왜 관대해지는가

극중 천둥은 자신을 거지 출신이라며 뒤에서 헐뜯는 아랫 사람에게 호통을 칩니다. 양반네들이 자신을 괴롭히며 부리는 건 괜찮고 자신과 같은 천민 출신의 천둥이 자신들을 부리는 건 싫다는 그네들의 논리가 기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천둥이 지적하는대로 그들의 자세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노비 근성'이며 어리석음입니다. 민란에 동조했던 천둥은 세상이 썩을 대로 썩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고 자신의 힘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용마골에서 강포수(권오중)이 일으킨 민란은 실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도망치듯 떠나 한양에 정착해 새 삶을 꾸려야 했습니다. 조선이란 썩어버린 나라에 정당한 요구를 했지만 고문받고 맞아죽은 그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기 보다 차라리 지배하는 사람의 논리에 동조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참봉을 거절하던 막순이 왜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주인나리의 방을 찾게 됐을까. 극중 천둥은 이런 심리를 '노비 근성'이라 표현했지만 현대적인 용어로는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심리를 나타내는 이 용어는 매맞는 아내나 학대당하는 아이들에게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주로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고 이겨낼 수 없을 때 이런 심리가 나타납니다.

친아버지를 만났지만 호감이 가지 않는 천둥. 귀동의 고민은 깊어간다.

막순과 삼월은 왜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떨쳐내지도 못하고 최소한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에게 증오의 감정 조차 표출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양반 사회의 논리에 동조하고 아들의 신분을 바꿔치기하고자 하는 막순을 현대인은 이해할 수 없을까요? 비슷한 상황을 어디선가 보았을 거라 봅니다. 삐뚤어진 사회 구조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은 자신이 역시 피해자임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사람은 현대사회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조선 후기 천민들의 삶은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길들이고자 하는 양반층의 횡포가 극에 달해 피폐하다 말로는 표현이 안되던 시절입니다. 극중 장꼭지(이문식)가 큰년(서이숙) 말고도 작은년(안연홍)이라는 첩을 두고 다른 거지들을 쥐어짜 배불리 먹고 사는 모습이 당시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자신들 역시 당하고 사는 사람들이면서 지배층의 질서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둥이 울부짖은 '노비 근성'의 현실,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 주장하는 막순이 끔찍한 꼴을 당하면서도 이참봉의 재물을 탐내 자신을 찾은 이유이고 어머니가 매맞아 죽을까봐 사실을 밝히지도 못하는 착한 귀동이 김진사의 아들로 뒤바뀌어 괴로워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막순이 자신을 여종으로 만든 그 사회를 거부하기 보다 그 사회에 편입되길 바라는, 그런 선택을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비난할 수도 없고 품어주어야하는 사람들이지만 아기 장수들의 어깨가 무겁기만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도둑 아래적

자신의 친아버지 이참봉의 얼굴도 못보고 죽을까 싶었던 귀동은 막순이 있는 이참봉의 집으로 찾아가 친부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천둥은 아무리 보아도 닮거나 피가 당기는 구석이 없는 이참봉을 보고 없던 정까지 뚝 떨어져 버립니다. 돈 때문에 갑작스레 나타난 아들 역할이 생전 처음 입어보는 도포 자락 만큼이나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귀동은 귀동대로 어떻게든 천둥과 금옥(이설아)의 혼인을 막아야하는 까닭에 마음이 바쁩니다.

간만에 포청에 출근해 헐장금(歇杖金)[각주:1]이나 차사례(茶事禮)[각주:2]를 금지하며 신참들의 군기를 다지는 귀동은 공포교(공형진)의 말처럼 청류에 몸을 맡기고 싶어하는 젊은 인재입니다. 그 역시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어떻게든 구시대의 틀 안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썩어빠진 포도청의 질서로 보아 절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천둥은 민란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을 보았기에 더 이상 강포수에게 가담하지 않겠다 갈등합니다.

도갑의 죽음과 아래적의 일원인 달이

양반의 핏줄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친부에게 산삼을 가져가고 성초시(강신일)의 공덕비에 이름을 올려주겠다는 등 호의를 보이기 시작하는 속물 동녀(한지혜), 돈 오만냥 얻자고 자신을 끌고간 어머니 막순, 왕두령(이기영)패의 횡포에 맞서 일전을 벌이다 죽은 도갑(임현성)으로 인해 천둥은 다시 갈등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신의 또다른 친구인 달이(서현진)가 아래적의 일원이었다는 것도 자극이 됩니다(我來의 비밀이 이렇게 풀리는군요).

민중사극 짝패의 러브라인과 지지부진한 사람들 이야기가 답답한 사람들은 분명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정과 패기는 언제 봐도 속시원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행보입니다. 시대적인 한계로 인해 억압받은 사람들이 일어서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적잖이 뜨거운 열기를 전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에 길들여진 사람들, 자신의 가해자인 이참봉이나 양반의 논리에 동조하는 막순이나 아랫사람과 어울리지 말라는 동녀같은 인물(원래 양반층이지만)들이 존재하는 한 민란은 성공할 수도 없고 새로운 시대는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시대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진득(임성규)이나 막순의 인생이 가여운 건 사실이라도 길들여진 자신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1. 포청에 들어온 범인을 체포, 인치할 때 범인에게 쌀, 돈 등을 받는 것으로 매를 덜 때리는 조건으로 받는 돈이다. [본문으로]
  2. 범인을 체포할 때 재물을 징수하는 규정, 수사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둔다. [본문으로]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