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아랑사또전

'아랑사또전' 귀신들도 배불리 먹는 명절이었으면

Shain 2012. 9. 3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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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전에 태풍이 연달아 오는 바람에 제사상에 올라야 하는 밤하고 대추값이 상당히 폭등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상을 간소화해도 밤이나 햇과일은 꼭 올려야하는 음식이다 보니 제사상을 마련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층층이 담아 한상 가득 차리던 과거에 비해 가지수가 줄어들었는데도 상을 마련하는 비용은 더 늘어났다는 말이 괜한 엄살은 아니더군요. 저희 집도 제사를 워낙 많이 지내는 집이라 어릴 때는 명절에 새옷이나 맛있는 음식 보다 제수에 더 많은 돈을 들이는거 같아 서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귀신이 음식을 정말 먹느냐 아니냐를 두고 따지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조상을 기리는 정성이 더 중요한 거라며 제사상에 돈을 아끼지 말라 주장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제사 자체를 부정하며 제사음식 올리는 거 보다 굶는 사람들에게 한끼 차려주는게 더 낫지 않느냐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주 옛날에야 부유한 종가집 위주로 제사를 지내니 기제사, 시제, 차례를 빠짐없이 지내도 풍족한 차림이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요즘같이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이 바쁜 시대에 죽은 사람들에게 넉넉한 인심을 보이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배곯는 귀신 아랑에게 '고수레'를 알려준 다른 귀신

기제사는 고인이 돌아가신 날 즉 기일 밤늦게 지내는 제사로 우리가 흔히 아는 제사입니다. 기제사는 보통 2대 조상까지 드리지만 집안에 따라서는 4대 조상까지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제 또는 묘사라 불리는 제사는 특정한 시기에 5대조 이상의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로 시쳇말로 기제사밥을 못 드시는 윗대 조상들을 위한 합동제사같은 것입니다. 그 외에도 종친회나 각종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같은 것도 있습니다.

공자가 살던 중국 보다 한국이 유난히 더 제사 문화가 널리 퍼졌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전통 정서는 저승으로 간 사람들에 대해 유난히 관대하고 동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승가면 안 그래도 배가 고플텐데 후손들이 차려주는 밥을 얻어먹지 못하면 그 저승에서 얼마나 힘들고 서글플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죽을 때도 억울했을텐데 저승에서 굶기까지 하면 한이 서린 원귀가 되어 산 사람에게 조화를 부리고 해를 끼친다고 믿었던 탓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잘 대접하면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좋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특히 일찍 죽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처녀귀신, 몽달귀신, 아이귀신같은 무자귀(無子鬼)는 제사를 올려줄 자손이 없어 죽어서 밥도 못 얻어먹다고 생각해 '고수레(또는 고시레)'라는 풍습을 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수레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과는 달리 원래부터 (해동가요에 실린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 나라에 있던 풍속이라 하는데 귀신을 쫓고 귀신에게 제물 즉 음식을 던져주어 액막이를 하는 행위입니다.

산 사람이 나눠주는 고수레를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하는 아랑

예전부터 사람들은 고사를 지내거나 새참을 먹거나 음식을 나눠먹기전에 '고수레'라는 말과 함께 음식과 술 등을 여기 저기 뿌리곤 했습니다. '고수레'라는 말 자체에는 여러가지 기원설이 있지만 이는 대개 굶주린 귀신들과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라 알려져 있습니다. 20-30년전만 해도 고사를 드리면 음식을 나눠 동네 여기저기에 놓는 걸 쉽게 볼 수 있었죠(주로 마을 어귀나 집앞 등). 드라마 속에서도 굶주려있는 귀신 아랑(신민아)에게 노인 귀신(임현식)이 나타나 '고시레'를 설명해주던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드라마 '아랑사또전'의 여주인공 아랑(신민아)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기억도 잃었습니다. 종종 글로 신기를 배운 방울(황보라)에게 신주 노릇을 하며 한상 얻어먹긴 하지만 그닥 신통치 않은 무당 방울은 아랑에게 넉넉히 차려줄 처지도 아닌지라 오죽하면 김치 한사발 올려놓고 치성을 들일 정도입니다. 그런 연고없는 귀신들이 밥을 얻어먹는 방법은 '고수레' 뿐이니 제사를 지낸 집 주변에는 늘 허름한 귀신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산 사람이 차려주는 무자귀들을 위한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아귀다툼을 해서 먹지않으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픈 귀신은 한이 쌓입니다. 그런 귀신이 조화를 부리면 산사람에게 해가 될 수밖에 없겠죠. 기를 쓰고 고수레를 집어먹는 아이 귀신이나 얻어맞고 치이면서도 끝끝내 고수레를 먹겠다 몸싸움을 하는 아랑과 패거리 귀신들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 장면은 '고수레'하고는 좀 다른 '헌식'이라는 것으로 집앞 '시식돌'에 제사지낸 음식을 올려 잡귀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입니다. 그 집이 제사를 지낸 집이었던게지요.

극중 아랑은 무당에게 얻어먹고 밥 때문에 다른 귀신에게 맞기도 한다.

정말 죽으면 그렇게 산 사람이 차려주는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걸까요. 현대 사람들은 몰라도 과거에는 그런 믿음 하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 상을 차리고 제사를 위해 자손을 두었나 봅니다. 열매를 다 따지 않고 한두개 남긴다는 '까치밥' 만큼이나 인상적인 전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각 절기를 따져 차례를 올리고 조상들에게 제사상을 차려주고 그것도 모잘라 원귀들을 위한 인심까지 베풀었으니 말입니다.

'아랑사또전'의 남자 주인공 김은오(이준기)는 산발한 머리에 헤어진 옷을 입은 아랑을 볼 수 있었고 그녀의 넋두리까지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배고프고 서러운 귀신들의 삶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싸움을 하고 거칠어지는 원귀들이 불쌍해보였을테구요. 이유도 모르고 죽은 아랑에게 측은지심을 가졌던 것도 두 사람의 사랑에 한몫을 했습니다. 사람이 된 아랑이 주왈(연우진)과 함께 시장에서 음식을 사먹다가 배곯는 귀신을 보고 먼저 주었던 것도 자신의 그런 기억이 떠올라 인정을 베풀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처녀귀신 아랑이 저승에 가자 제사상을 차려 대접한 은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종종 고수레를 위해 내놓은 음식을 마을에서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아무대서나 고수레하고 헌식을 했다간 쓰레기 버린다며 야단을 듣고 길고양이나 유기견이 들끓는다고 민원을 넣을 지 모릅니다. 현대사회는 산 사람들을 위한 시대이고 산 사람들끼리 부대끼기도 바쁜데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온정을 베풀 만큼 여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 역시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제사나 산 사람들의 질서까지 흐트리는 그런 일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구요. '자식은 굶어도 제사는 지낸다'고 했던 옛날 어른들의 태도는 솔직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햇과일이 나고 햇곡식이 풍성한 이 시절에 배곯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일년중 지금 만이라도 먹는 걱정 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또 사후세계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 풍족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때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습니다. 평소에 어머니가 제사 문제로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제사에는 좋은 감정이 없다가도 배곯는 귀신까지 염려하는 옛사람들의 마음이 달리 보일 때가 있더라구요. '아랑사또전'의 굶주린 아랑을 보면서 명절의 차례 생각을 떠올린게 웃기기도 하지만 그만큼 흔히 볼 수 있는게 우리 나라의 제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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